고시생 그들만의 세상…“목적의 삶”

천국과 지옥의 두얼굴 ‘서울 신림동 고시촌’

김정민 기자 2006.06.02 15:28:22

▲신림 9동 고시촌 전경. 고시학원과 독서실·고시식당 등이 어우러져 있다. (사진=김정민 기자)

“이번 정류장은 고시촌입니다.”

고시생들을 위한 곳, 고시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곳, 일종의 합격을 위한 ‘관문’인 신림동. 버스정류장 명칭이 되어 버린 이름도 유명한 ‘고시촌’이다.

고시생,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에 맞춰 신림동 고시촌은 철저히 세상과 다른 모습으로 변해왔다. 그곳에는 ‘고시생의 고시생을 위한, 고시생에 의한’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다.

고시촌에 들어서면 일단 ‘헉! 이런 곳이 있구나’ 싶을 정도로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간판들이 눈에 띈다. 일단 수많은 고시원·독서실 그리고 고시식당과 서점 간판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 간판에는 주로 ‘고시’ 자가 앞에 붙어 있어 일반인들은 왠지 이방인이 된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 두 얼굴 가진 고시촌

이 곳은 그야말로 고시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각종 학습 시설과 부대시설·편의시설 그리고 유흥시설과 놀이시설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다른 것은 그렇다치고 웬 놀이시설과 유흥시설? 독서실 수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많은 것이 PC방과 게임방·비디오방 등이다. 그런데 이들 공간이야말로 고시생들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달래주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곳인 동시에 ‘마약’과도 같은 존재로 통한다.

주로 이런 곳은 주말에 머리를 식히려는 고시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특히 시험이 다가올수록 평일에도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고시생들을 볼 수 있다. 포기자가 속출하면서 이러한 공간이 도피처로 작용하는 것이다.

4년간의 고시공부를 접고 취업전선에 뛰어든 김모씨(30)는 “불합격이라는 것에 못지않게 점점 사회 적응력이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방향전환의 가장 큰 이유였다”고 말했다. 한참 활동할 20대를 한 곳에서 반복된 생활을 하며 버티기에는 이곳 신림동은 가혹할 정도로 많은 인내와 고통을 필요로 한다.

24시간 ‘시험’이라는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고시생들은 최근 유행한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라는 노랫가사를 ‘내가 쉬어도 쉬는게 아니야~’라고 바꾸어 부르기도 한단다.


■ 시시각각 다른 모습의 고시촌

▲고시촌 곳곳에는 PC방을 비롯한 놀이시설과 유흥시설이 포진해 있다. (사진=김정민 기자)

신림동만의 독특한 고시문화는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그가운데 특징적인 몇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시간대별·요일별·계절별로 다른 모습이 연출된다는 것. 고시생들마다 자신만의 고유한 학습방법과 생활패턴이 있겠지만, 대부분 고시생들의 하루 일과는 고시원에서 시작해 독서실과 학원을 오가다 다시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마감된다.

이런 이유로 고시촌 길거리는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한산한 모습을 보이다가, 점심 시간이나 저녁시간이 되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온 고시생들로 활기를 띈다.

고시생들에게 식사시간은 허기를 떼우는 목적 외에 각종 정보교류의 장이 되기도 한다. 식당과 주변 카페에서는 삼삼오오 얘기를 나누는 고시생들을 심심찮게 볼 수가 있다.

또 밤이 되면 야행성 고시생들, 일명 올빼미족과 야식을 먹기 위한 고시생들로 주변 분식집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인기 있는 메뉴는 단연 떡볶이나 김밥·라면 등 분식류지만 최근에는 인테리어가 잘 된 생과일 쥬스점이나 카페테리아도 인기다.


■ 고시생들의 빈부차…성향도 ‘천차만별’

▲학원 강의를 수강하기 위해 접수실에서 강의자료를 살펴보며 접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고시생들. (사진=김정민 기자)

전국 각지에서 청운의 꿈을 안고 고시의 길로 접어든 이들은 출신지역과 학교, 연령, 경제적 여건 등 또한 천차만별이다.

고시생들에게는 무엇보다 재정적인 문제가 가장 큰 부담 중 하나다. 대개 부모와 가정을 비롯한 주변의 경제적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다보니, 보통 4년 이상 투자해야 한다는 수험기간은 부담이 클 수 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학원비·독서실비·고시원비·식비·도서비와 생활비만 하더라도 월 100만원은 족히 든다. 이런 이유로 같은 고시촌 내라도 빈부의 차가 확실하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소위 부르주아 고시생을 위한 최고급 원룸과 독서실이 있는 학원가 일대 ‘고시촌 시내’는 신림동의 ‘비버리힐즈’로 통한다. 반면 고학생들과 장수생들이 몰려있는 관악산 자락의 고지대에 위치한 ‘고시촌 달동네’는 작고 오래된 고시원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 가정식에서 뷔페식까지 풍성한 식문화 ‘영양공급원’


고시생들은 주로 고시식당에서 한달에 11~12만원에서 14~15만원 하는 월식을 한다. 대개는 한 장당 2,000원~2,500원하는 식권을 구입해 먹는다. 가정식 백반이나 뷔페식으로 되어 있는 식당들은 고시생들의 입맛과 건강을 책임지는 고시생들의 주 영양공급원.

복날에는 삼계탕이나 영양탕을, 추석 때는 송편, 설날 때는 떡국 등이 나온다. 특히 시험 목전에는 각종 영양식이 제공돼 고시생들의 건강을 챙긴다.

고시식당을 8년째 운영하고 있는 안 모씨는 “체력관리가 중요한 고시생들을 위해 맛과 영양을 동시에 신경써야 한다”며 “고시생들의 각기 선호하는 다양한 입맛에 맞추기 위해 늘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고 있다”고 식당운영 노하우를 살짝 귀띔한다.

인기있는 식당에서는 끼니 때가 되면 고시생들이 식당 입구에 줄 서 있는 진풍경도 연출된다. 특별메뉴와 과일, 음료수와 같은 디저트까지 제공되는 이 곳의 많은 식당들은 월요일은 쇠고기 수요일은 돼지고기, 금요일은 닭고기 요리를 내놓는 것이 일종의 관례처럼 되어 있다.

고시생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체력. 이들에게 체력은 ‘국력’이 아닌 ‘실력’으로 통한다. 고시생들의 건강을 챙기는 방법도 천태만상이다.

가장 대표적인 건강 유지 방법은 운동과 한약을 포함한 보양식. 고시촌 곳곳에 들어선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는 고시생들이 늘어남에 따라 최근 시설 좋은 헬스클럽도 늘어나는 추세다.

시험이 다가오면 운동보다 영양제와 한약, 심지어는 링거까지 맞아가면서 공부하는 수험생들이 속출하기 때문에 항시 독서실 냉장고마다 한약과 영양제가 가득하다.


■ 시험방식 변경으로 학원마다 ‘토익·텝스’ 강의도 이뤄져


얼핏 폐쇄적인 것으로 보이는 고시촌에도 안팎으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여성 고시생이 꾸준히 증가하며 합격률에서도 여성 합격생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작년 사법시험과 행정고시에서 여성이 수석을 차지했으며, 합격자 중 여성 비율은 사시·행시 각각 32.3%, 44.0%를 기록하며 해마다 크게 증가하고 있다.

또한 기존 외국어 시험이 사법고시를 비롯한 많은 국가고시에서 영어 시험으로 대체되면서 신림동 학원가는 토익이나 텝스 강의를 병행하고 있는 것도 최근 신풍속도 중 하나다. 학원마다 소위 ‘잘 나가는’ 영어 강사들이 한 두명씩 포진하고 있다.

몇몇 대표적인 학원은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학교와 같은 곳으로 인식된다. 인기있는 강사의 수업을 듣기 위해서 새벽부터 수강신청을 하기 위해 줄을 서거나, 좋은 자리에서 강의를 듣기 위해 줄을 서는 모습을 이곳에서는 예사로 볼 수 있다.

또 혼자 공부하는 것을 선호하는 고시생들은 인터넷 동영상 강의나 PMP로 강의를 다운해 공부하기도 한다.

고시공부를 하다 아예 고시전문강사로 나선 박모 강사는 “시험 유형이 매번 달라지고 점점 어려워지는 추세라서 강사들은 고시생들보다 오히려 더 많이 공부하고 먼저 변화에 먼저 적응력을 키워야 한다.”고 애로사항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강사들 중에는 시험을 함께 준비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보니 강사와 고시생들이 동고동락하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고 있는 셈이다.


■ 대한민국 최고의 시험, ‘사법고시’를 넘어라

▲한 고시서점 벽에 붙어 있는 각종 서적과 학원 강의 홍보물 가운데 토익 강사의 사진이 보인다. (사진=김정민 기자)

신림동은 오는 6월 20일부터 4일간 치러지는 사법고시 2차 시험을 앞두고 긴장감과 함께 약간의 전운마저 감돌고 있다.

사법고시는 객관식인 1차 시험과 2차 시험, 면접에 해당하는 3차시험으로 이뤄진다.

고시공부 7년차로 접어들어 2차 시험만 3번째를 기다리고 있는 이모씨는(33) “가장 힘든 것은 아무래도 심적인 불안과 답답함”이라고 했다. 그는 원래는 쾌활하고 농담도 잘하는 성격이었는데, 혼자 지내는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이제는 사람들을 만나면 ‘울렁증’이 생길 정도라는 농담아닌 농담도 건넨다.

이들에게 합격은 목적인 동시에 또 하나의 새로운 도전의 출발점이다. 해마다 천여명의 고시생을 배출하고 있는 현 제도에서 더 이상 합격은 ‘최종 목적’이 아닌 수많은 관문 중 하나가 되어 버렸지만, 이 관문을 넘는 것이 일단 최대의 고비이기 때문이다.

2003년부터 필수 과목인 외국어가 영어로 통일되면서 일정 수준의 토익·토플·텝스 점수를 획득해야 사법고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따라서 장수생들에게는 사법시험보다 영어시험이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 영어시험이 필수화 된 후 영어라는 장벽을 넘지 못한 사람들은 법무사를 비롯한 다른 국가고시로 방향을 전환하기도 한다.

논란이 되고 있는 로스쿨 제도 도입도 고시생 뿐 아니라 고시생들을 통해 생계를 꾸려가는 이들에게는 커다란 이슈가 되고 있다. 아직 확정은 되지 않았지만, 도입될 경우 이르면 2008년부터 시행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로스쿨의 시행여부를 놓고 많은 말들이 오간다.

하지만 고시촌에는 로스쿨의 도입 여부도 불투명할 뿐 아니라 도입 되더라도 현 제도와 병행하는 유예기간이 있어서인지 아직까지 로스쿨 제도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왜 이 길을 선택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합격’이라는 인생의 로또를 꿈꾸는 것이 아니냐고.”

이 모씨는 분명하게 잘라 말한다. “부와 명예를 바라보고 이 고생을 자처한다면, 좀 더 수월한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내가 가야할 길이라는 자기 확신과 이를 통해 이루고 싶은 분명한 목적의식 없이는 단 하루도 이 삭막한 곳에서 버틸수 없다.”면서 말이다.

고시생들에게 있어 합격은 ‘고생 끝, 행복 시작’이 아닌 더 힘들고 고단한 새로운 역경을 시작하는 하나의 절차에 불과했다. 그런 그들이기에 기꺼이 이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였다.

고시생들은 불투명한 미래, 고독과 압박감으로 굳은 표정에 발걸음은 무거워 보였지만, ‘희망’이라는 꿈이 있어 그들의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끝없이 도전하는 그들에게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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