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이 은행의 종노릇”…尹 한마디가 부른 관치금융
‘주담대 금리인하→부동산 활황→은행 폭리’ 1년의 시간
전문가들 “결국 정부가 ‘은행 이자장사’ 좌판 깔아준 셈”
정신 못차린 정부…내년에도 부동산 시장에 55조원 공급
예금금리를 내리고 대출금리를 높여 예대마진을 늘리는 은행권의 이른바 ‘이자장사’가 정점에 이르고 있다. 기준금리 인하 추세와 역주행하며 높은 대출금리로 막대한 수익을 내고 있는데 대한 비판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정부는 폭발적으로 증가한 가계대출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결국 금융당국의 오락가락 정책이 은행들을 살찌워준 셈이 됐다. 이런 상황이 초래된 내막을 심층취재했다. (CNB뉴스=도기천 기자)
“서민들이 마치 은행의 종노릇을 하는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이 정확히 1년 전인 2023년 10월 30일 국무회의에서 격노하며 했던 이 발언이 몰고 온 파장은 엄청났다. 이때부터 본격화된 정부의 금융통제는 역대급 수준의 가계대출 증가, 아파트 가격 급등, 시장금리 교란 등 결과적으로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했다. 이 틈을 타 시중은행들은 천문학적 이윤을 챙기고 있다.
당시 윤 대통령의 발언 의도는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이 고금리로 인해 번 돈을 고스란히 대출 원리금을 갚는데 쓰는 안타까운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김주현 당시 금융위원장은 금융지주회사 CEO들을 소집해 “대출이자 부담을 낮출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달라”고 주문했고,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은행들에게 ‘상생금융’에 나서라고 압박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메시지는 엉뚱한 방향으로 효과를 발휘했다. 은행들이 압박에 못이겨 대출금리를 내리기 시작하자 부동산 시장이 요동친 것.
기준금리 3.5%보다 낮은 3% 초반대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등장했고, 선순위 담보가 설정돼 있어도 금리 상단이 5%를 넘지 않았다.
‘빚내서 집 사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자 대출 규모가 급증하면서 수도권 부동산 가격이 치솟았다. 2021~2022년 부동산 급등기 때의 최고가를 돌파한 ‘신고가’가 속출하기도 했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전국의 아파트 매매거래량은 올해 3월 4만호, 4월 3만8000호, 5월 3만9000호, 6월 4만3000호, 7월 4만8000호로 계속 증가했다. 수도권 아파트 거래는 3월 1만7000호에서 7월에는 2만7000호까지 늘었다.
거래가 늘면서 전국 아파트 3.3㎡당 가격은 올해 초 2089만원에서 9월에는 2109만원으로 0.95% 상승했으며, 특히 서울의 1500가구 이상 대단지 아파트 3.3㎡당 가격은 4430만원에서 4582만원으로 3.32% 치솟았다.
가계대출 증가세는 8월까지 이어졌다. 특히 8월에는 스트레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2단계 도입되기 전 막차 수요로 은행권 주택담보대출이 전달에 비해 8조2000억원 늘어나며 역대 최대 증가폭을 기록했다. 은행권 주담대 잔액은 9월말 기준 897조8000억원으로 사상 최고치다.
당초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의 금리 부담을 덜어주고자 했던 대통령의 의도가 전혀 다른 상황을 야기한 것이다.
‘창과 방패’ 동시에? 아마추어 정책이 ‘부메랑’ 돼
이렇게 된 데는 정책 혼선과 이를 틈탄 은행들의 발빠른 이자장사 등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우선 금융당국은 ‘부동산 시장 활성화’와 ‘가계부채 억제’이라는 상반된 2개의 정책을 동시에 시장에 적용하면서 큰 혼란을 초래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당초 7월부터 시행 예정이던 2단계 스트레스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을 돌연 9월로 두달 연기한 점이다. 스트레스DSR은 차주가 대출 이용기간 중 원리금 상환 부담이 상승할 가능성을 미리 감안해 일정수준의 가산금리(스트레스 금리)를 부과하는 것으로, 대출한도를 줄이는 데 목적이 있다.
하지만 금융위원회는 건설사들의 프로젝트파이낸싱(PE) 부실 사태로 인한 부동산 침체를 우려해 시행을 미뤘고, 이는 아파트 매매 시장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됐다.
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디딤돌대출 등 정책금융도 가계부채 증가에 한몫했다. 국토교통부가 최근 민주당 이연희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주택도시기금을 재원으로 하는 정책대출인 디딤돌·버팀목대출은 올해 1∼9월 42조847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27조7868억원)보다 무려 14조3979억원(51.5%) 증가했다.
이같은 금융당국의 실기(失期)로 수도권 아파트 가격이 치솟고 대출이 급증하자, 이번에는 금융감독원이 정반대 카드를 꺼냈다. 지난달부터 은행들에게 대출금액 축소, 심사요건 강화 등 강력한 대출규제를 요구한 것이다.
이에 은행들은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에도 불구하고 대출규제의 일환으로 금리를 올리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30일 현재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등 5대 시중은행의 주담대 고정금리는 3.74~6.14%로, 지난달 말 3.64~6.15%에서 하단이 0.10%포인트 상승했다. 지난 11일 한국은행 기준금리가 3.5%에서 3.25%로 낮아진 점을 고려하면 역주행 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수신금리는 빠르게 내려가고 있다. 은행연합회에 공시된 5대 시중은행의 1년 만기 정기예금 기본금리는 현재 연 2%대까지 떨어진 상태다. 기준금리 인하 이후 불과 보름여 만에 3%대 예금금리가 자취를 감췄다.
은행들 “우리도 억울…지금와서 정부가 유체이탈”
예금금리가 내리고 대출금리가 오르며 은행들의 예대마진(대출금리과 예금금리 간 차이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 덕분에 역대급 실적행진을 이어가는 중이다.
KB금융지주의 1∼3분기 당기순이익은 4조3953억원으로 사상 최고였고, 3분기 순이익(1조6140억원) 역시 창사 이래 최대 규모다. 신한금융지주 또한 3분기까지 누적 순이익이 3조9856억원으로 기존 기록을 갱신했다. 우리금융지주는 3분기까지의 누적 순이익(2조6591억원)이 이미 지난해 연간 실적(2조5063억원)을 넘어섰다. 하나금융지주와 NH농협금융지주 역시 각각 1~3분기 누적 순이익 3조 2254억원, 2조 3151억원을 거둬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이런 상황에 대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관계자는 CNB뉴스에 “은행들이 정책 혼선을 틈타 막대한 이윤을 챙기고 있다. 가계대출 관리를 구실로 대출금리를 올리고 있다면 그만큼 수신금리도 올려야 앞뒤가 맞는데, 이중으로 이자장사를 하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한 시중은행 임원은 CNB뉴스에 “정부가 대출금리를 내리라고 해서 내렸고 그래서 주담대 수익이 늘어난 건데 지금 와서 이자장사 한다고 비판하고 있으니 당황스럽다. 정부의 시장 개입이 금융권 전반에 큰 혼란을 주고 있다”고 토로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정부는 내년에도 55조원 규모의 부동산 정책 상품을 공급할 계획이다. 디딤돌·버팀목 대출 등으로 서민의 주거비 부담을 경감한다는 목적이지만, 올해 같은 ‘가계대출 급증→부동산 불안→은행권의 이자 폭리’ 상황이 내년에도 되풀이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과 한문도 교수는 “가계부채 문제와 은행권 이자장사를 동시에 잡으려면 부동산 정책을 과감하게 수정해야 한다”며 “지금처럼 정부가 부동산에 미련을 둔다면 계속 금융정책이 오락가락할 것이고, 결국 서민들만 피해를 보게 된다”고 강조했다.
(CNB뉴스=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