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재단의 ‘신격호 계승’에 신동빈 회장 ‘불편’
과거 경영 분쟁 ‘앙금’ 남아…따로 창업주 추모
롯데家의 얽히고설킨 과거사 속 전통성 ‘신경전’
3세 승계에 악영향…대리전 양상으로 번질 수도
고(故) 신격호 롯데 창업주의 장녀 신영자 롯데재단 의장이 ‘신격호 계승사업’에 힘을 쏟고 있는데 대해 롯데그룹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는 과거 경영권 분쟁에서 비롯된 복잡한 감정과 차세대 경영승계 작업 등이 복합적인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CNB뉴스가 롯데가(家)의 말못할 속사정을 취재했다. (CNB뉴스=도기천 기자)
신영자 의장이 이끄는 롯데재단은 올해 들어 부쩍 신격호(1922~2020) 창업주(명예회장)의 뜻을 기리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다. 신 의장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이복누나다.
롯데재단은 지난 2월 울산의 신 창업주 선영에서 4주기 추모식을 열었고 4월에는 서울 마포 신격호 롯데장학관에 흉상을 건립했다. 5월에는 신 창업주의 일대기를 담은 뮤지컬 ‘더 리더’를 제작하기도 했다.
또한 창업주 울산 생가와 롯데 별장(2434평), 인근 국가 소유 부지(409평) 등 총2843평에 ‘신격호 기념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재단은 ▲생가 보수 및 생가 주변 추모공원 조성 ▲가족별장의 기념관으로의 리모델링 ▲‘문학청년 신격호’를 컨셉으로 한 테마공원 ▲VIP숙소 및 관리동 등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인근 도로명을 ‘신격호로(路)’나 신 창업주의 호를 따 ‘상전(象殿)로’로 명명해줄 것도 지자체에 건의하기도 했다.
오는 10월에는 ‘신격호의 꿈, 함께한 발자취: 롯데 CEO들의 기록’이라는 제목의 평전을 출간한다. 책에는 롯데쇼핑, 롯데면세점, 롯데호텔, 롯데월드, 롯데케미칼, 롯데중앙연구소 등 주요 계열사 전직 CEO들이 경험한 창업주에 대한 경영 일화가 담겼다.
지난 6일에는 롯데 전직 CEO 30여명과 롯데재단 관계자 등 1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평전 원고에 대한 시상식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신 의장은 “원고를 써주신 롯데그룹 전직 CEO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롯데재단에서 아버님의 경영철학과 리더십을 이어받아 후대에도 전하겠다”고 말했다.
‘창업주 계승’ 주도권 잡은 신영자 의장
하지만 롯데재단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롯데그룹은 못마땅한 눈치다.
신동빈 회장과 롯데그룹 현역들은 롯데재단이 주도한 신 창업주 4주기 추모식에 불참했으며, 대신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에서 추모식을 따로 가졌다. 이곳에는 롯데그룹이 지난 2021년 신 창업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흉상과 기념관이 있다.
신 회장과 신 회장의 장남 신유열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전무)은 롯데재단의 ‘신격호 일대기 뮤지컬’ 공연 때도 재단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롯데별장을 기념공원으로 조성하는 사업에도 롯데그룹 측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신격호 공원’의 메인 부지가 될 롯데 별장(2434평)은 신 회장과 신 회장의 형인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SDJ코퍼레이션 회장)이 절반씩 개인 명의로 갖고 있는데, 두 사람이 기부만 해주면 공원 조성 사업은 일사천리로 추진될 수 있다. 신 전 부회장은 호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롯데그룹 측은 아직 재단에 공식입장을 밝히지 않은 상태다.
롯데재단 관계자는 23일 CNB뉴스에 “기념공원이 조성되면 재계 순위에 비해 빈약한 창업주 생가가 그룹 격에 어울리는 곳으로 탈바꿈하고, 인근 대암댐 공원과 연계돼 지역 명소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며 “신동주 전 부회장 측은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가져오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롯데그룹 측은 아직 묵묵부답”이라고 전했다. 롯데그룹 측은 “재단의 활동은 그룹과 별개”라며 말을 아꼈다.
롯데그룹·재단 ‘엇박자’ 뿌리는 ‘그날 쿠데타’
이 같은 롯데그룹과 재단의 엇박자는 여러 해석을 낳고 있다. 우선 10여년 전 경영권 분쟁에서 비롯된 앙금이 남아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롯데가(家)는 신 창업주로부터의 경영승계를 놓고 신동빈 회장과 신동주 전 부회장이 크게 충돌한 바 있다.
두 사람이 롯데 계열사 지분을 경쟁적으로 사들이고 있던 2014년 12월, 신 전 부회장이 롯데 부회장, 롯데상사 부회장 겸 사장, 롯데아이스 이사에서 해임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어 2015년초 지주회사인 일본롯데홀딩스 이사직에서도 추가로 해임됐다. 사실상 경영일선에서 퇴출된 것. 이전까지는 ‘일본=신동주, 한국=신동빈’으로 힘의 균형이 유지됐었다.
이에 맞서 신 전 부회장은 신 창업주(당시 롯데그룹 총괄회장)와 신영자 의장, 신동인 롯데케미칼 고문 등 친족 5명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신동빈 측으로 분류되는 일본롯데홀딩스 이사 6명을 해임했다.
신 회장은 이같은 행위가 이사회를 거치지 않은 불법이라며 반발, 긴급 이사회를 열어 부친인 신 창업주를 일본롯데홀딩스 대표이사회장에서 해임했다.
하지만 신 전 부회장은 부친이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했다며 다시 동생(신동빈)을 압박했다. 그는 한일 롯데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일본롯데홀딩스 주총에 수차례에 걸쳐 ‘신동빈 회장 해임안’을 제출하고 여러 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주주들은 신 회장을 절대적으로 신임했고, 신 전 부회장은 완패했다.
신 전 부회장에게 기대고 있던 신 창업주는 2017년 재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건강이 악화했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2020년 1월 19일 별세했다.
이 과정에서 창업주의 장녀이자 신 회장의 이복누나인 신 의장은 신 전 부회장 편에 섰다. 신 전 부회장이 신 회장 측 이사들을 해임하는 과정에 함께 했으며, 신 회장으로부터 해임된 창업주를 마지막까지 챙겼다.
이런 과거사로 볼 때, 신 회장 입장에서는 ‘신격호 계승사업’을 벌이고 있는 신 의장이 불편할 수 있다.
다시 등장한 신동주, 롯데재단과 손잡나
여기까지가 신 회장과 신 의장 간의 해묵은 앙금에서 비롯된 신경전이라면, 보다 현실적인 이유도 관측된다.
신 의장의 두 딸인 장혜선 롯데장학재단 이사장과 장선윤 호텔롯데 전무가 신 회장의 장남인 신유열 전무의 경영승계 작업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다.
1986년생인 신 전무는 지난해 말 정기인사에서 승진해 롯데지주 신설조직인 미래성장실과 롯데바이오로직스의 글로벌 전략실을 이끌고 있다. 최근 신 회장과 공개 활동에 나서는 등 보폭을 넓히는 중이다.
특히 신 전무는 2008년 노무라증권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2020년 일본 롯데 영업본부장, 롯데케미칼 일본지사 상무보를 거쳐 현재 일본 롯데파이낸셜 대표이사를 겸임하는 등 한·일 롯데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까지 유일한 롯데그룹의 승계 후보자로 거론된다.
이런 가운데 최근 일본롯데홀딩스 최대주주인 신 전 부회장이 신 전무의 일본롯데홀딩스 이사 선임 안건에 반대하고 나서는 일이 발생했다. 지난 6월 롯데홀딩스 정기주총에서 신 전무의 이사 선임안이 통과되긴 했지만 신 회장 측으로서는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이처럼 사사건건 신 회장의 발목을 잡아온 신 전 부회장이 롯데재단 측과 본격적으로 연대할 경우, 자칫 롯데가(家)의 전통성이 신영자 의장 측에 기울 수도 있다. 이미 신 전 부회장은 롯데재단의 각종 ‘신격호 계승사업’에 지원 의사를 밝힌 상태다.
롯데그룹 임원 출신의 한 재계 관계자는 CNB뉴스에 “신동주-신동빈 형제간 분쟁이 앞으로 대리전 양상으로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며 “경영승계에 속도를 내고 있는 신동빈 회장으로서는 롯데재단의 최근 횡보가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CNB뉴스=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