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뉴스=도기천 편집국장)
“이번에 전국적으로 호우피해가 큽니다. 정부재정 만으론 벅찹니다. 회장님이 기업들 독려해서 수재의연금을 좀 마련해주셨으면 합니다”(대통령실 00수석)
이런 요청이 온다면 한경협은 어떤 답을 내놓을까?
한경협(한국경제인연합회)은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이 이름을 바꾼 경제단체다. 오는 18일 새명칭으로 공식출범한다.
그동안 전경련은 국민들에게 ‘정경유착의 대명사’로 인식되며 전(前) 정권 내내 ‘패싱’ 당했다. 대통령의 주요국 순방 때마다 동행했던 경제사절단에서 이름이 사라졌으며, 정초마다 열리던 ‘경제계와의 간담회’ 때도 부르지 않았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대기업 총수와 경제단체장들이 정부 부처를 들락거릴 때도 존재감이 없었다. 전경련이 일본 최대 경제단체인 게이단렌(經團連)과 1983년부터 정기적으로 ‘한일재계회의’를 열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1 흑역사로 얼룩진 전경련
전경련은 한때 한국 경제계를 대표하는 거대조직이었다. 초대 삼성 이병철 회장을 비롯, 현대 정주영, LG 구자경, SK 최종현, 대우 김우중 등 5대 그룹 총수들이 돌아가며 회장을 맡았다. 근대화 시기에 전경련은 자유시장경제를 뿌리내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의 자금줄(일해재단) 역할을 해온 사실이 1988년 5공 청문회를 통해 드러났고, 1995년에는 전두환·노태우의 대선 비자금 사건에 휘말려 총수들이 줄줄이 법정에 섰다. 1997년 15대 대선 때는 23개 대기업이 166억원의 정치자금을 낸 사실이 알려져 도마에 올랐다.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정치권과의 밀월은 계속돼 왔다.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국민의힘의 전신) 대선 후보 측에 823억원을 지원한 일명 ‘차떼기 사건’으로 국민적 공분을 샀다.
박근혜 정권 때는 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최순실씨가 실소유주인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기업 53곳으로부터 774억원 걷어 지원했다. 이로 인해 기업총수들이 줄줄이 검찰·특검의 조사를 받았고 국회에 불려 나갔으며 이중 일부는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이런 와중에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재벌개혁을 적폐청산 1순위에 올렸고, 전경련은 존재감이 사라져갔다. 차기 회장 선출을 위한 정기총회를 열었지만 주요 그룹 회장이 모두 고사해, 결국 허창수 GS그룹 회장이 세 차례나 ‘셀프 연임’해야 했다.
이 사이 재계의 중심축은 대한상의(대한상공회의소)로 이동했고 ‘중소기업·소상공인 살리기’에 올인했던 박용만 두산 회장에 이어 ‘10만 사회적기업론’을 주창하던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상의 회장에 오르면서 한국 재계의 주도권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2 새이름 ‘한경협’…이름만 바꾼게 아니다?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던 전경련이 최근 기사회생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친기업 분위기를 타고 재도약을 선언한 것. 지난달 임시총회를 열어 명칭을 한경협으로 바꾸고 회장직에 류진(65) 풍산그룹 회장을 앉혔다. 우여곡절 끝에 삼성·현대차·SK·LG 4대 그룹도 한경협에 재가입했다.
놀랄 수준의 혁신안도 발표했다. 정경유착 흑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단체 내에 윤리경영위원회를 설치하고 ‘윤리헌장’을 만들었다. 헌장에는 ‘정치·행정권력 등의 부당한 압력 배격’ 등을 명시했다.
산하의 연구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을 흡수 통합해 싱크탱크형 경제단체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미국의 정책연구기관인 국제전략연구소(CSIS)를 모티브로 삼아 국가별 경제협력위원회를 활성화하고 글로벌 전문가 네트워크를 체계적으로 구축한다는 것.
‘노쇠했다’는 이미지 탈피를 위해 IT·엔터테인먼트 등 신성장 업계에 손을 벌렸다. 국내 대표 포털·IT기업 네이버·카카오, 그룹 BTS 소속사인 하이브, 글로벌 이커머스 쿠팡, 유통·물류 혁신플랫폼 ‘배달의 민족’(우아한형제들) 등에 회원 가입을 요청하는 공문을 띄웠다.
류 회장은 취임사를 통해 “어두운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잘못된 고리는 끊어내겠다”고 선언했다.
#3 혁신의 전제는 ‘디테일’
과연 한경협은 지금의 의지대로 변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구호에 그치는 ‘윤리선언’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
예를 들어 서두에 언급한 ‘정치권으로부터의 수재의연금 모금 요청’이 왔을 경우에 대비해 미리 규약을 정해둘 필요가 있다. “회비 외에는 모금 불가” 또는 “국가적 재난일 경우에만 모금한다”고 회칙에 명시해두는 식이다. 그래야 ‘외압’인지 아닌지도 구분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의 도화선이 된 미르·K스포츠재단의 기업모금 행위도 취지는 그럴듯했다. 장애인 등 소수자 스포츠 지원과 소외지역 생활체육시설 건립을 내세워 기업들에게 동참을 요청했고 대부분 기업들은 정말 좋은 일에 쓰이는 줄 알고 자금을 댔다고 한다. 이런 모호함이 없도록 미리 정리해 두자는 것이다.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고 하지 않았는가? 류 회장은 총론(總論)이 화려해도 각론(各論)이 구체적이지 못하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경제상식을 꼭 기억하기 바란다.
(CNB뉴스=도기천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