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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사라진 1288개의 꿈…다시 ‘건국대 항쟁’을 말한다

1986년 그날에 멈춘 시간…이제라도 진실 밝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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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도기천기자 |  2022.12.22 09:51:29

(CNB뉴스=도기천 편집국장)

 

그날은 국화꽃이 만개했다. 스무살 청춘들은 삼삼오오 짝지어 일곱색깔 무지개가 내려온 듯한 교정을 거닐었다. 파란 하늘 아래 가을바람을 타고 살랑살랑 흔들리는 꽃들의 군무(群舞)는 꿈많은 청춘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하지만 마냥 즐겁진 않았으리라. 골리앗처럼 거대해진 군사정권, 아득해진 민주주의의 꿈, 국화꽃 너머에 포진한 수많은 군홧발들, 시위가 주는 긴장과 두려움, 앞날에 대한 불안감…

‘들을 빼앗겨 봄마저 빼앗겼다’는 어느 시인의 절규처럼, 그날의 청춘들에게 꽃·하늘·바람이 온전한 모습 그대로 전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누가 청년들을 죽음으로 몰았나

 

불안한 평화였지만, 그나마도 오래가지 못했다. 집회가 끝날 무렵, 국화꽃밭은 순식간에 최루탄 연기로 덮였다. 기관총 소리 같은 굉음이 지축을 울렸고 연기 속에서 수천개의 헬멧(시위진압용 투구)과 방패가 거대한 회색 파도가 되어 빠르게 다가왔다.

헬멧들은 토끼몰이하듯 학생들을 건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당황한 청춘들은 마치 포성 속 피난민처럼 황급히 건물 안으로 몸을 숨겼다. 불과 한두 시간 만에 5개 건물에 2000여명이 고립됐다.

36년전 건국대 항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1986년 10월28일~10월31일 나흘간 음식·물·전기가 끊어진 채 건물에 갇혀 목숨을 건 농성을 벌인 사건이다.

경찰은 ‘해산’이 아닌 ‘포위’ 형태로 진압하며 학생들을 건물 안으로 몰았고, 그 직후부터 기다렸다는 듯 정부와 언론의 대대적인 여론몰이가 시작됐다.

방송·신문은 고립된 학생들을 ‘점거농성 중인 공산혁명분자’라고 보도하며 판을 키웠다. 반공이 국시(國是)이던 시절, 독재정권이 자신들의 정권유지를 위해 ‘용공(容共) 조작’을 시도한 것이다.

학생들은 나흘 간 경찰과 대치하다 헬리콥터와 최루탄, 물대포(소방호스)를 동원한 대대적인 진압에 의해 모두 체포됐다. 1487명(이후 체포된 이들까지 포함하면 1525명)이 연행돼 1288명이 구속된 것. 단일 사건 구속자 수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건대항쟁 당시 학생들이 경찰에 포위된 채 건물 옥상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모습. (10·28건대항쟁계승사업회 제공)

이 과정에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53명의 학생들이 중상을 입고 입원했으며, 입원하지 않은 학생들도 대부분 심한 구타를 당했다. 건국대학교측 역시 당시 집계로 24억원 가량의 재산 손실을 입었다. 한마디로 교정 전체가 쑥밭이 된 것이다.

당시 피해자들은 36년이 흐른 지금에야 본격적인 진상규명에 나섰다. 국가기관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에 368명 명의의 진실규명 요청서를 최근 접수했다.

CNB뉴스는 지난 5일 단독보도([단독] “구속자 1288명”…‘건국대 항쟁’ 그날의 진실 드러난다)를 통해 수십년 간 묻혀있던 이 사건을 수면 위로 올렸다.

우리가 여기에 주목하는 이유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당시 건물에 갇혔던 학생들의 대부분은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무려 5명의 청년이 후유증 등으로 꽃같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으며, 육체적·정신적 트라우마로 현재까지도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작전계획 ‘황소30’ 실체 밝혀야

지난 2016년 사건 발생 30년을 맞아 몇몇 피해자들이 ‘건대 항쟁 계승사업회’를 만들었는데, 이 단체가 첫 번째로 시작한 일이 피해자 현황을 기록하는 ‘기억록’ 사업이었다.

건대 항쟁에는 전국의 여러 대학이 참가해 학생들끼리 안면식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30년이 지나 당시 피해자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계승사업회는 수소문 끝에 20여명을 찾아냈는데 하나같이 극심한 후유증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계승사업회에 따르면,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화상을 입거나 최루탄 파편이 몸에 박혀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경우, 구타로 인해 신체 특정 부위가 제기능을 못하게 된 경우 등이 여럿이었다. 또 대부분 ‘빨갱이’로 낙인찍혀 취업이 제한되는 등 사회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지금도 좁은 공간에 있으면 당시가 떠올라 숨쉬기가 어렵다는 이들도 있었다.

사건 당시 2학년 여학생이었던 A씨는 CNB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구속됐다 풀려난 뒤 몇명이 모였는데 그 자리에서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 고향으로 내려간다’며 펑펑 울던 한 남학생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청년들의 꿈은 그렇게 송두리째 뽑혀 버렸다.

 

건국대 교정에 마련된 당시 대학생들의 항쟁을 기리는 비석. (사진=도기천 기자)  

이제 국가가 이 사건의 진실을 밝혀주길 바란다. 우선 진화위 직권조사를 통해 전두환 정권이 내무부치안본부, 안기부, 보안사 합동으로 치밀하게 준비했던 작전계획서 ‘황소30’을 입수해 공개해야 한다. 여기에는 왜 시위대를 해산하지 않고 건물 안으로 몰아넣었는지, 학생들을 용공분자로 규정한 근거가 무엇인지 등 건국대 사건의 핵심이 담겨 있다. 당시 작전에 참가했던 경찰지휘관 중 생존해있는 사람이 있다면 양심고백도 기대한다

아울러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피해자 의료지원과 보상,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한다. 이는 인도적 차원을 넘어 민주화운동사의 구멍난 한 부분을 메우는 작업이다. 다시는 이런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자는 다짐이기도 하다. 반성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된다.

(CNB뉴스=도기천 편집국장)


* 본 칼럼에 전개된 당시 사건 장면 묘사는 생존자들의 증언, 건대 총학생회가 제작한 ‘건대항쟁 자료집’, 사건 직후 발간된 ‘건대항쟁 참가자 수기모음집’ 등을 토대로 이뤄졌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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