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도기천 편집국장)
#1. 전쟁
사망자 6620명, 누적 확진자 76만2983명. 여기에다 백신 부작용으로 고통받는 이들까지 합하면 하루에 국내에서만 수만명씩 사상자가 발생하는 셈이다. 지구촌 전체로 보면 더 숨이 막힌다. 이미 2억8200만여명이 감염됐고 그중 563만여명이 사망했다.(26일 9시기준) 이는 한국전쟁·베트남전의 희생자 수보다 많다.
팬데믹 여파로 생계난을 겪는 이들도 갈수록 늘고 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 집계한 소상공인 폐업 현황에 따르면, 2021년 한해 동안 가게 문을 닫은 소상공인이 23만6487명에 이른다. 매달 1만9707개, 매일 648개 업소가 사라진 것.
사람들은 감염자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다 세상을 떠났는지, 자영업자들이 왜 울분을 토하는지에 별 관심이 없다. 확진·사망·폐업자 수는 그저 매일 올라가는 숫자 그래프일 뿐이다. 이 정도 상황이면 가히 ‘전쟁통’에 견줄만하다.
#2. 사람
눈과 귀를 막고 애써 외면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우리는 인간이야”하는 외침이 들려온다.
김밥 장사로 평생 모은 전 재산을 기부하고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해온 박춘자 할머니, 매일 아침 등굣길 아이들에게 무료로 빵을 나눠온 제빵사 김쌍식씨, 36년간 영유아 119명을 양육해 온 국내 최장기 위탁모 봉사자 전옥례씨, 예식장을 운영하며 54년간 형편이 어려운 예비부부들이 최소 비용으로 결혼식을 올릴 수 있도록 도와준 백낙삼씨, 12년간 매일 폐품을 수거해 번 돈으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온 박화자씨, 48년간 무료진료 봉사의 길을 걸어온 고영초 건국대 교수, 수십년간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무료 반찬 나눔 봉사를 해온 우영순·이상기씨, 56년간 무료진료와 무료급식 봉사를 하고 있는 박종수 원장, 30년간 보수 없이 무료급식소 ‘사랑의 식당’에서 봉사하고 있는 조영도 총무이사, 95세의 고령에도 34년 동안 서울 영등포구 무료 급식소에서 주5일 봉사를 이어온 정희일 할머니…
코로나 시대에 빛과 소금이 되어준 우리의 평범한 이웃들이다.
#3. 희망
이들의 선행은 LG그룹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LG복지재단은 ‘국가와 사회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의인에게 기업이 사회적 책임으로 보답한다’는 고(故) 구본무 회장의 뜻에 따라 2015년 ‘LG의인상’을 제정해 지금까지 169명에게 의인상을 수여했다.
구광모 회장이 취임한 2018년 이후에는 사회 곳곳에서 타인을 위해 묵묵히 봉사와 선행을 다하는 일반 시민으로까지 수상 범위가 넓어졌다. “진심이 담긴 우리만의 방식으로 사회에 더 다가가자”는 구 회장의 뜻이 반영된 것이다.
LG의인상은 LG가(家)의 뿌리와 닿아있다. 이야기는 LG 창업자인 연암 구인회 선생에서부터 시작된다.
구 창업주는 일제강점기 시절 경남 진주에서 ‘구인상회’라는 포목상을 경영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는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상해임시정부에 1만원을 쾌척했는데, 당시 80kg짜리 쌀 500가마니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이 사실이 발각되면 사업은 물론이고 집안까지 풍비박산 날 수도 있었지만, 구 창업주는 “당할 때 당하더라도 나라를 되찾고 겨레를 살리는 구국운동에 힘을 보태는 것이 우선”이라며 선뜻 자금을 내놨다고 한다.
이런 정신을 계승해 해방 직후인 1947년 설립된 락희화학공업(현 LG그룹의 모태)은 거대 기업으로 커나가는 70년 세월 동안 ‘정도(正道)경영’을 지켜왔다.
수많은 재벌가에서 형제 간, 부모자식 간 분쟁이 판을 쳤지만 LG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 장자가 경영권을 승계하면 총수의 형제들은 그룹 경영에서 손을 떼고 퇴진하거나 분사하는 게 전통으로 굳어졌으며, 재계에서 흔한 경영비리 사건도 LG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LG의인상’은 바로 이런 기업풍토 위에 세워진 것이다.
놀랍게도 LG가 의인들에게 준 상금의 대부분은 다시 사회에 환원되고 있다. LG 측에 따르면 의인들은 상금을 자신이 해오던 선행에 사용하거나 복지기관 등에 후원하고 있다고 한다.
LG가의 애민(愛民)·애국(愛國) 정신이 의인상을 탄생시켰고, 의인에 대한 물질적 지원이 다시 사회적 약자를 돕는 종잣돈이 되고 있는 것이다. 희망이 희망을 낳고 있다.
#4. 바램
LG의인상에 담긴 이같은 정신이 재계와 사회를 잇는 징검다리가 되길 바란다. 제2, 제3의 기업의인상이 탄생해 메마른 세상을 적셔주고 척박한 세상에 희망메시지를 전했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 최근 재계에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ESG경영에 의인상을 접목하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다. ESG는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의 머리글자를 딴 단어로, 기업활동에 친환경, 사회적 책임 경영, 지배구조 개선을 도입하자는 글로벌 캠페인이다. 기업이 묵묵히 선행을 이어가고 있는 의인들과 연계해 후원의 지속가능성을 가진다면 ESG의 취지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이렇게 희망이 두텁고 넓게 퍼지는 세상을 꿈꿔본다. 코로나 상처를 치유하고, 포스트 코로나를 준비하는 유일한 길은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 외에는 없다. 가장 위대한 백신은 결국 ‘우리’ 아니겠는가.
(CNB=도기천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