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공정경제 3법’에 속도를 내는 가운데, 정부가 또 다른 기업규제 법안인 집단소송제와 징벌적손해배상제 도입을 입법예고하자 재계는 충격에 빠진 모습이다. 박용만(두산인프라코어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중심으로 총력 방어에 나서고 있지만, 믿었던 야당마저 돌아서면서 정기국회 통과 가능성이 높아진 상태. 이 법안들 외에도 국회에는 기업을 옥죄는 법안이 3백여개나 발의돼 있다. 여야 할것 없이 기업 압박에 나선 배경은 뭘까? (CNB=도기천 기자)
너도나도 ‘기업 옥죄는 법’ 쏟아내
야당도 재벌개혁…재계 ‘망연자실’
“여의도-재계, 소통 막혀” 지적도
국감 파동, 법안통과 분수령 될듯
“국회가 경제에 눈과 귀를 닫고 자기정치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하다하다 시장 20km내 대형마트를 금지한다는 법까지 나왔다. 국회 앞에서 1인시위라도 벌이고 싶은 심정이다”(유통대기업 임원)
현재 정부·여당이 밀어붙이고 있는 대표적인 경제개혁 법안은 ‘공정경제 3법’으로 불리는 상법 개정안, 공정거래법 개정안, 금융그룹 감독에 관한 법률 제정안이다. 이와 함께 징벌적손해배상제와 집단소송법 제정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는 모두 기업활동에 부담을 주는 사안들이다. 재계는 자칫 경영권을 침해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 반대하고 있다. 특히 삼성 현대차 SK LG 효성 롯데 GS 한화 LS CJ 두산 한진 금호아시아나 대림 신세계 아모레퍼시픽 등 총수일가의 지배력이 큰 기업집단은 더 그렇다.
퇴직해도 노조원? 규제법안 봇물
상법개정안에서는 감사위원 분리선출제 도입과 대주주 의결권 3% 제한 조항에 대한 반발이 가장 크다.
현행 상법은 이사를 먼저 선임한 뒤 이사 가운데 감사위원을 선출하도록 돼 있는데 개정안에는 감사위원 중 최소 1명 이상을 이사와 분리해 선출하도록 하고 있다.
또 최대주주의 의결권은 특수관계인과 합산해서 3%로 제한된다. 가령, 현대자동차는 올해 상반기 기준 현대모비스(21.43%)와 정몽구 회장(5.33%), 정의선 수석부회장(2.62%) 등 오너 일가(특수관계인 포함) 지분이 29.38%에 달하는데 이 법이 시행되면 감사위원 선임시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3%로 쪼그라든다.
정부·여당은 감사위원이 대주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경영활동을 감시하기 위해서는 이 제도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재계는 감사위원 선임 과정에서 대주주가 배제될 수 있고 펀드·기관투자자 등 외부세력이 경영권을 위협할 수 있다며 우려한다. 적대적 인수합병(M&A) 세력이 연합해 감사위원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얘기다.
모(母)회사 주주가 불법을 저지른 자(子)회사 임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한 ‘다중대표소송제’도 뜨거운 감자다. 개정안은 비상장회사 주식 지분의 100분의 1이나 상장회사 지분 1만분의 1만 보유해도 해당 회사가 50% 이상 출자한 회사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재계는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경영에 지나치게 개입해 주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발하고 있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에서는 일감 몰아주기(사익편취) 기준이 강화됐다. 규제 대상이 총수 일가가 지분 30%(상장사는 20%)를 가진 기업에서 20%를 가진 기업으로 확대됐다.
금융그룹감독법 제정안은 삼성, 현대자동차 등 금융사를 소유한 대기업그룹을 규제하자는 취지다. 대표회사를 중심으로 내부통제협의회를 만들고, 그룹의 주요 위험요인을 공시하도록 했다.
여권은 ‘공정경제 3법’ 외에도 집단소송제 도입과 징벌적 손해배상제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집단소송제는 피해자 50인 이상이 모여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내서 승소하면, 비슷한 처지에 놓인 나머지 피해자들은 별도 소송 없이 동일한 배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다. 기존에는 증권 분야에만 적용됐는데 이를 산업 전 분야로 확대했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반사회적 행위를 한 기업은 실제 소비자가 입은 피해액보다 더 많이 배상하라는 제도다.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태, 벤츠·닛산·포르쉐 등의 배출가스 조작 사건, 은행권의 사모펀드 부실판매 사태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법무부는 지난달 28일 이런 내용들을 담은 ‘집단소송법 제정안’과 ‘상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박용만 “기업들 힘겹게 버티는데…”
이밖에도 국회에는 3백여개가 넘는 규제법안이 대기 중이다. 대한상의에 따르면 지난 6월부터 8월까지 3개월 동안만 284건이 발의됐다. 20대 국회 같은 기간에 비해 약 40% 증가한 수준이다.
이 중에는 전통시장으로부터 20㎞ 이내에는 대형마트·쇼핑몰을 금지하는 법안도 있다. 이 법이 통과되면 전국 어디에도 대형마트가 들어설 수 없게 된다.
해고자 등 퇴사한 직원의 노조 활동을 허용하자는 법안도 대기 중이며, 중대재해 발생시 사업주를 형사처벌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도 통과를 앞두고 있다.
이처럼 수많은 규제법안이 쏟아지자 재계는 총력 방어전을 펼치고 있다. 그간 경총, 전경련 등 경제단체들은 공정경제 3법과 관련해 공동 의견서를 제출하는 등 비교적 온건한 방식으로 반대해왔지만, 최근에는 직접 국회를 찾아 ‘읍소’하고 있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지난달 22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잇달아 면담하고 재계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앞서 박 회장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코로나19 여파로 매일매일 생사의 절벽에서 발버둥치고 있는데 정치권은 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작심발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손경식(CJ그룹 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도 지난달 말 이틀에 걸쳐 의원들과 야당 지도부를 만나 개정안에 대한 재계의 우려를 전했다.
‘전경련 나비효과’ 지금까지?
하지만 정치권은 이런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민주당 등 여권은 ‘공정경제 3법’의 이번 정기국회 통과를 목표로 속도를 내고 있다.
민주당이 경제법안들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지난 4.15총선 승리로 당내 기류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총선 전까지만 해도 정부는 삼성을 비롯한 재계와 긴밀한 공조를 취해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작년에 두 번씩이나 삼성전자·삼성디스플레이 생산공장을 방문해 지원을 약속했으며, 지난 2월 청와대가 주재한 ‘코로나19 대응 경제계 간담회’ 때는 “내수 진작을 위해 기업 회식의 주 52시간제 저촉 우려를 해소해 달라”는 재계의 건의에 즉각 화답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는 남북이 화해무드로 접어들던 2년여 전부터 쭉 이어져 왔다. 특히 평양정상회담 직후인 2018년 연말에는 재벌개혁을 주도했던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퇴진하고, 시장친화적 인물로 알려진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경제사령탑에 오르는 등 큰 변화가 있었다. 남북협력사업에 대기업들의 참여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다시 교착상태에 빠지자 흐름이 ‘유턴’했다.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열린민주당 등 범진보 진영이 국회 전체의석(300석)의 3분의 2에 달하는 189석을 확보하자 재벌개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실제 CNB가 민주당의 공약집을 분석해보니, 과거부터 추진해온 재벌개혁과 노동권 강화가 총망라돼 있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야당마저 법안처리에 긍정적인 분위기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사실상 ‘조건부 찬성’을 표명한 상태다.
김 위원장은 최근 언론인터뷰에서 공정경제 3법에 대해 “정부가 낸 법안이라고 무조건 반대할 수는 없다. 우리도 과거에 하려고 했던 것이니 큰 틀에서 수용하는게 맞다. 문제가 있는 부분은 국회심의 과정에서 고치면 된다”고 말했다. 한발 더나가 법안에 반대하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에 대해서는 “그 사람은 자유시장경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모르는 것 같다”고 돌직구를 날렸다. 김 위원장은 과거 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 있을때 상법개정안을 대표발의 했으며,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으로 옮겨가서는 경제민주화를 주도했었다.
기업인들은 재계와 정치권의 소통 고리가 사실상 끊어진 점이 결과적으로 이런 상황을 초래했다고 입을 모은다. 재계 고위관계자는 CNB에 “과거에는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을 중심으로 정치권과 활발하게 소통했는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정치인들은 여야 할것없이 재계와의 접촉을 꺼리고 있다”고 말했다. 전경련은 박근혜 정부때 대기업 53곳으로부터 774억원 걷어 최순실씨가 실소유주인 미르·K스포츠재단에 출연한 바 있다. 이로인해 현 정부로부터 적폐 취급을 받으며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야당까지 기울어…국감이 최대 고비
이런 여러 상황으로 볼 때, 기업규제 법안들의 통과는 사실상 초읽기에 들어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서해상 실종 공무원 피살사건을 비롯해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군 시절 특혜의혹,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공수처장) 선정 등 각종 쟁점을 두고 여야 공방이 극으로 치닫고 있는 점이 개정안 처리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은 있다. 야권은 7일부터 시작된 국정감사에서 이런 사안들을 벼르고 있는 만큼 국감 파장의 강도에 따라 법안처리의 속도가 정해질 전망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CNB에 “지금 국회에 상정된 법안들은 대부분 20대 국회에서 발의됐다가 중단된 것들인데, 당시에는 여권이 과반 의석을 갖지 못해 흐지부지됐지만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다르다”며 “부동산 임대 3법처럼 여당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업인들의 우려가 크다”고 토로했다.
또다른 기업 관계자는 “(여야)협치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거린다. 차라리 (여야 간에) 정쟁이 불거졌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까지 든다.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