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국회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한 민주국회가 될까.
아니면 테러방지법을 제정한 비민주적인 국회로 평가받게 될 것인가.
16대 국회에서 두 차례나 제정하려다 무산됐던 테러방지법제정 시도가 17대 국회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제정되지는 않았지만 4월 국회에서도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테러방지법을 제정하려 했었다. 지금도 국회에는 공성진 의원이 앞장선 한나라당의 ‘테러대응체계의 확립과 대테러활동 등에 관한 법률'이 제출되어 있고, 열린우리당도 시안을 확정했다.
양당이 추진중인 테러방지법은 반인권적이고 반민주적인 법이다.
테러방지법안에는 국가정보원 산하에 대테러센터를 두고 국가정보원에 테러 예방활동 명분으로 정부 각 부처의 업무를 지휘 감독하는 초법적 권한을 주도록 되어 있다.
국정원장은 대테러센터의 장이 되어 정보수집은 물론 필요한 조치를 직접 지휘할 수 있게 된다. 대테러센터의 장은 비상계엄에 준하는 테러경보 발령권, 테러관련 대책기구 구성권, 대테러보안협의회 구성권, 수사권, 출입국 통제 및 외국환 거래 지급정지 요청권 등 마치 계엄사령관을 연상케 하는 권한이 주어진다. 관계기관은 대테러센터 장에게 통보의무, 공무원 파견의무 등의 의무까지 부담하고 있으므로 대테러센터는 명실공히 각 부처 위에 군림하게 될 것이다.
국정원이 정보수집에 그치지 않고 행정부처까지 지휘하도록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국정원의 권력남용 방지가 중요한 정치개혁 과제인데, 국정원에게 과거와 같은 무소불위의 폐쇄적이고 독점적인 권한을 되돌려주는 것은 큰 잘못이다. 정치권이 제정하려는 테러방지법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국정원을 거대권력기관으로 변질시킬 것이다.
국정원에게 대테러활동의 주도권을 주는 것은 국정원 개혁에 중요한 걸림돌이 될 것이다.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정원은 국무총리의 통할을 받지 않고 다른 정부부처에 의한 감시와 통제도 불가능하다. 국정원은 비밀주의를 속성으로 하는 정보기관이다. 정보력에 기반한 정보기관의 권한 강화는 국가의 민주적 운영에 항상 위협이 되는 요소이다. 게다가 테러의 개념도 모호해 자의적 남용의 위험성이 크고, 의사표현의 자유도 심각하게 제한되는 등 국민의 기본권이 크게 침해될 것이다.
한나라당안에는 테러 개념이 매우 막연하다. 구체적 행위를 특정하지 않은 채 ‘테러단체 또는 그 구성원에 의하여 행해지는 폭력행위’를 테러로 규정했다. 목적도 ‘정치적·이념적·인종적·종교적·민족적 또는 그 밖의 유사한 목적’으로 막연해 정당한 국민의 저항권이 테러로 몰릴 수도 있다. “UN에서 테러단체로 지정한 단체”라는 구절도 있는데 유엔은 아직 명시적으로 ‘테러단체’를 규정한 바 없다.
테러방지법이 제정된 뒤 ‘테러위험인물’로 의심받기라도 하면 영장도 없이 임의동행 형식을 빌린 강제연행에 의해 출입국·금융거래․통신이용 등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자 하는 대테러센터의 조사를 받아야 한다. 센터가 테러를 ‘우려’하면 법무부장관의 출입국규제를 받을 수도 있고, ‘가능성’만으로도 재정경제부장관에 의해 외국환 거래를 정지당할 수 있다. 외교통상부장관을 통해서는 해외여행도 제한받을 수 있다. 축소되거나 폐지되어야 할 국정원의 감청권한이 확대되어 국민의 통신의 자유도 무차별적으로 침해될 수 있다.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지난날 국가정보원(그 전신인 중앙정보부와 안전기획부)은 정치공작의 하수인 노릇을 해왔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국가정보원의 수사권을 폐지·축소하고, 정보기관으로서의 본연의 임무만 투명하게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테러 예방을 명분으로 삼아 오히려 국정원 권한을 강화시키는 법에 국회가 앞장서서는 안 된다. 개념조차 규정되지 못한 ‘테러’ 위협을 내세워 국민의 기본권과 민주주의 원칙들을 포기하고 정보기구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시도는 중단되어야 한다.
테러방지법은 테러방지를 위해 꼭 필요한가?
정부와 국정원의 주장처럼 테러방지법이 없으면 테러를 방지하지 못하는가?
그렇지 않다.
한국경찰의 정보력은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 기존의 법 체제 아래서도 일상적인 불심검문, 전화 및 기타 통신매체에 대한 감청, 광범위한 정보수집이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다 경찰내부에 대테러특수부대 등 충분한 방어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지금의 법 체계에서도 국가정보원은 광범위한 테러정보수집활동을 이미 시행하고 있다.
국가정보원은 2003년 12월부터 국방부, 경찰청 등과 합동으로 ‘대테러상황실’을 운영중이다. 2004년 10월 국정감사 때에는 ‘테러정보통합센터’ 운영계획을 발표했다. 정보능력 강화를 위해 굳이 별도의 법을 만들 필요가 없다. 또 통합방위법을 비롯해 형법,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군형법, 항공법 등 테러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형사법도 있다. 각종 재난에 대해서는 관계부처 장관이 모이는 회의체도 있고, 소방방재청도 있다. 기존 법제와 기구로도 테러에 대한 대책의 수립과 집행에 별 문제가 없는데도 광범위한 대테러활동을 기획·조정·총괄하는 체계를 만드는 것은 불필요한 예산 낭비일 뿐이다.
테러방지법은 제2의 국가보안법이 될 것이다. 오랫동안 국가보안법의 폐해에 고통받아 온 국민들로서는 테러방지법이 제2의 국가보안법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테러방지법은 안보위협으로 시민들을 주눅 들게 하고 정보기구의 권한을 강화하는 반민주적 법이다.
테러방지법은 오히려 테러에 굴복하는 법이다. 테러 방지라는 명분으로 국정원의 권한이 비대해지고 견제 받지 않는 권력기구화되는 것은 명백한 민주주의의 후퇴이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테러방지법 제정 재추진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
<테러방지법 반대>는 테러를 용인하거나 테러방지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다.
테러방지라는 ‘미명’아래 국가의 경찰권력, 정보권력을 강화하고 국민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제한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테러의 위협이 얼마나 심각한지 국민들은 알지 못한다. 정부와 테러전담기구인 국정원은 테러의 위협에 대해 “국가 기밀”이라며 정확하게 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있다. 국가정보원은 북한, 한총련, 국내과격 이슬람 세력, 심지어 각종 불만세력․소외세력의 움직임을 테러로 일괄 묶고 있다.
9·11 이후 여러 나라에서 테러방지대책이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들은 세계적 공안정국 상황에 편승한 반인권적 법률·조치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테러방지를 명목으로 미국정부는 외국인과 불법이민자에 대한 통제를 강화시켰다. 일본정부는 테러정국을 이용해 일본의 군사력 강화에 힘을 쏟고 있다. 중국 및 말레이시아 등지에서는 자국 내 소수인종을 탄압하는데 테러정국을 이용하고 있다. 독일정부는 9·11 사건을 연방과 주의 경찰력을 강화하고, 정보기관의 권한을 확대하는데 이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테러방지를 내세워 국정원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하는 것이다. 국가가 테러방지를 위해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국가정보원의 기능 및 권한 강화를 우려한다.
국가인권위도 2003년의 테러방지법안에 대한 우려를 밝힌 바 있다. 대통령 소속하에 국가대테러대책회의를 두고 이를 정점으로 국가기관은 물론 지방자치단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관을 하나의 조직체계로 편성하고, 테러의 진압 등을 위해 특수부대와 군병력을 계엄이 아닌 상황에서도 치안유지활동에 동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국가정보원이 핵심적인 기능을 맡게 됨으로써 국가정보원법에서 규정한 기능과 권한을 크게 확대하는 것이다.
범국가적 재난의 일종인 ‘테러’에 대한 방지는 현존하는 국가재난방지체제로도 충분하다. 현존체제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하지 못하는 인적구성이 문제인 것이다. 국정원은 테러방지법 제정으로 정보기관의 기능을 뛰어넘는 권한 강화를 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국민에게 약속했던 개혁을 더욱 빠르게 추진해 국민에게 봉사하는 정보기관으로서의 제자리를 찾도록 해야 한다. 테러방지법은 결코 제정되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