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선거시즌이다.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정당마다 혁신을 외치고 있다. 공천혁신, 인물혁신, 정당구조 혁신, 정치문화 혁신… 과연 4월 13일 선거를 치르고 나면 이런 혁신과제에 대한 진도가 얼마나 나가 있을까?
혁신(革新)은 원래 ‘가죽을 베끼어 새 가죽을 만든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가죽을 베끼는 데는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아무도 스스로 고통을 원치 않는다. 여기에 혁신의 어려움과 딜레마가 있다.
이제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방법으로 기존의 관습과 조직을 바꾸는 데 있어서는 주변 사람과의 갈등이 일어난다. 일면식 없는 먼 동네 사람들과의 갈등이 아니라 매일 부대끼며 한솥밥 먹던 사람들과의 갈등이다.
이를 설득 또는 세련되게 무마(컨설팅 프로젝트에서는 이를 변화관리라 부른다) 시키지 않고는 혁신은 허울 좋은 구호에 그치고 만다.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죠지프 슘페터가 혁신이라는 용어를 ‘생산성의 동인(動因)’이라 말한 이후, 경영학계는 혁신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왔다.
경영대가들의 순위를 2년마다 매기는 thinkers50 사이트에서 2011년과 2013년 1위를, 2015년에 2위를 차지한 이도, 혁신이라는 주제만 수년 간 파온 하바드 경영대학원의 클레이튼 크린슨텐슨이다.
그에 따르면 혁신활동은 존속적 혁신(sustainable innovation)과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 나눠진다. 기존 제품의 품질을 높이고 생산·인건비를 줄이는 방법을 존속적 혁신이라 불렀다.
반면 과거 진공관 라디오를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바꾼 SONY의 예처럼 기존 판을 뒤 엎는 것을 파괴적 혁신이라 부른다.
당연히 후자가 더 높은 생산성을 가져다 준다. 이 파괴적 혁신을 달성하는 방법으로 로엔드(저가격) 정책으로 시장을 접근하는 방법과 비(非)소비자 마음을 사는 신시장 공략을 제시한다.
여기서 그의 이론을 빌어 한국의 정치상황을 들여다보자.
각 정당마다 본격적인 공천 작업이 한창이다. TV채널에 부지런히 얼굴을 비추며 듣고 싶었던 얘기를 방송에서 해준 인물들에게 공천을 주는 것, 각계 명망가를 공천 심사위원으로 위촉하는 것, 인기가요를 개사해 귀에 감기는 로고송을 만드는 것, 입에 착 달라붙는 선거구호를 만드는 것은 ‘존속적 혁신’의 예들이다. 이는 선거 때마다 반복해서 해오던 활동들이고 ‘정치 판’에 오래 계신 분들이 그 누구보다 잘하는 일이다.
반면 생활전선 곳곳에서 인정 받고 있는 재야 무림고수를 찾아내 생활밀착형 정치무대로 데뷔시키는 것은 로엔드 전략이다.
또 정치기사에는 눈도 안주고 투표일을 놀러 가는 날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투표장으로 끌고 오는 것은 신시장 전략에 비유할 수 있다.
지난 달 안철수 의원의 새정치연합 탈당 선언문을 보면 정치판에서 혁신 추진의 어려움이 곳곳에 담겨 있었다.
“더 큰 혁신은 배척당하고, 얼마 되지 않는 기득권 지키기에 빠져 있습니다. 혁신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혁신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당 안에서 변화와 혁신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안에서 도저히 안 된다면, 밖에서라도 강한 충격으로 변화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조직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해온 필자의 경험에서 말하자면 크린슨텐슨의 파괴적 혁신이 새정치를 하고자 하는 안철수 의원에게 필요한 비기(秘器)다.
정치고수들이라는 사람들의 조언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조금 줄여서라도 파괴적 혁신을 어떻게 한국 정치에 적용시킬까 답을 찾는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이때 로엔드 전략을 시도하는 데 있어서는 ‘정치적 미숙함’이라는, 신시장 전략을 시도하는 데 있어서는 대한민국에서 ‘제3당 흑역사(黑歷史)’가 반박논리로 제시될 것이다. 결과물로 답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이것이 혁신가들이 걸어온 길이다.
당장 정치선수들의 날 선 비판이 들려온다.
“정치와 경영은 다른 영역인데 어설픈 외국 이론을 가지고 훈수질 하려 하느냐.”
오늘 시점에서 대한민국에서만은, 정치가 아닌 경영이 더 나은 생산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 [정세현의 튀는 경제]는 매월 1회 연재됩니다
■ 정세현
현 티볼리컴퍼니(Tivoli Company) 대표, ㈜한우리열린교육 감사
전 삼일PwC Advisory 컨설턴트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영국 Nottingham Trent University M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