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李 지시 ‘어공이 모든 책임’ 新품의법, X피아들 따를까

책임소재 뭉개며 권한 누리기 딱 좋아… 실행하는지 지켜봐야

최영태 기자 2026.02.26 11:53:36

24일 국무회의에서 이 대통령은 새로운 기안서 작성법을 지시했다. (전주MBC 뉴스화면 캡처) 

24일 국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파격적인 새 시스템을 제안했습니다. 바로 장관 등 부처장들, 속칭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된 고위 공직자들)이 책임지는 새 기풍을 기안-품의 제도의 개혁으로 이뤄 달라는 당부였습니다.

한국의 품의 제도(중앙부처라면 주무관 → 사무관/서기관 → 국장/실장 → 차관 → 장관 순으로 올라가면서 서명하는)는 일본에서 들어왔지요. 그런데 이 제도가 참 묘한 게, 실제로는 마치 조폭 두목의 지령처럼 이뤄지기 쉽다는 점입니다.

조직폭력배 두목이 특정인을 제거하고자 할 때 명시적 언어로 “누구를 언제, 어디에서, 이런 방식으로 제거하라”고 말 또는 문서-문자를 통해 지시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식의 물증이 남으면 두목이 처벌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지나가는 말투로 “요즘 누가 좀 거슬리더라”는 정도만 얘기해도 그 말투나 눈빛의 강도로 아래 조직원들이 뜻을 읽고 실행에 옮긴답니다. 이래야 경찰이 해당 실행을 처벌할 때 두목-수괴의 지시가 명확치 않으니 ‘알아서 실행한 아랫것들’만 처벌되고 조직은 거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바보가 돼야 따르기 좋은 품의 시스템

한국의 품의 제도가 바로 그런 조폭 식이라는 게 최동석 인사혁신처장이 2014년에 펴낸 책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짓’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한국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인다는 한국은행에 근무하면서 최 처장은 ‘최고 엘리트들이 벌이는 너무나도 멍청한 짓’의 본질을 품의 제도에서 목격했답니다.

공직사회든 사기업이든 ‘기안서’라는 것은 대개 윗사람의 지시로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윗사람의 ‘의도’가 있어 기안이 시작되므로 아랫사람은 윗분의 의도를 눈치껏 알아채야 합니다. 하위직이 기안한 기안서는 위로 올라가면서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이른바 ‘빠꾸’를 당하며 도돌이를 하는 등 우여곡절이 보통이 아니라고 하지요.

 

'품의서 작성 가이드' 책.


최 처장은 책에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품의제도에 의한 의사결정은 그 속성상 여러 사람의 의견 중에서 가장 좋은 의견을 선택하기보다는 각 사람의 욕구 충족을 위한 최대공약수가 선택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한 전문성을 요구하기보다는 힘센 사람의 의도에 따라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게 됩니다.”(222쪽)

이렇게 힘센 자가 결정하지만 “그 진실은 문서에 나타나지 않”(226쪽)습니다. ‘도돌이’를 시킨 사람은 자신의 의도를 반영시켰지만, 최종 결재 문서에는 이런 숨은 사정은 전혀 써 있지 않습니다. 대신 ‘아랫사람 누구가 제안해 윗사람 누구누구가 최종 결재했다’뿐만 남습니다.

이렇게 실행된 사업이 사후 문제가 되면 누가 책임을 지나요? 실제 조종자는 ‘힘센 자’지만 그런 내용은 서류로 안 남아요. 그러니 조폭 처벌 때처럼 아랫것들만 다치기 십상이지요.

서명자가 여럿이므로 책임을 미루기도 좋습니다. 윗사람은 “나는 하기 싫었는데 아래에서 하도 하자고 해서…”랄 수 있고, 아랫사람은 “위로부터 구두 지시가 내려왔으니 내 책임은 아니다”고 할 수 있고 얼버무리기 참 좋지요.

대통령의 두 제안, 과연 자리 잡을까

이런 난맥상에 대해 이 대통령은 24일 국무회의에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이렇게 말합니다. “일을 열심히 하면 나중에 감사나 수사를 당한다는 우려 때문에 관행적인 업무 외에는 하지 않으려는 풍토가 있으니, 하급자들에게 ‘책임은 내가 진다’는 점을 분명히 알려줘야 한다”며 2가지 방법을 지시합니다.

 


1. 기안서의 처음에 ‘이 기안서는 장관의 지시에 따라 기안된 것임’을 명기하라는 것입니다. 책임은 ‘어공’에 있다고 명시되면 일이 술술 진행되리라는 것이지요.

2. 복수의 기안서를 만들게 하고 그 중 하나를 장관이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최종안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면 실무자가 스트레스를 받으니, A안, B안, C안 등 복수 안을 가져오게 해서 장관이 그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이렇게 국무회의에서 지시했지만 과연 공무원 사회가 위 1, 2 사항을 새로운 시스템으로 정착시킬지는 지켜봐야 합니다. 왜냐면 현재의 ‘책임을 뭉개는 시스템’이 공무원들에게는 좋은 점도 많기 때문입니다.

최 처장은 위 책에서 품의 제도를 독일식 ‘권한과 책임’(각 공무원이 자신의 권한과 책임을 갖는) 시스템으로만 개선해도 세 가지 효과가 있을 것으로 진단했습니다.

1. 품의 제도에 소요되는 인원을 절반으로 줄여도 업무 처리에 문제가 없고(인원 절감)
2. 윗분의 엉덩이만 쳐다보면서 ‘줄 대기’에 몰두하지 않아도 되므로 국민-주민에 더 집중하게 되고(대민 서비스 향상)
3. 조직 내 힘센 사람의 숨은 의도가 덜 중요해지므로 전문가가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전문가 채용 가능)는 세 가지입니다.

 

최동석 인사혁신처장의 책 표지. 


이런 세 가지 개선, 부처 인원이 절반으로 줄고, 줄 서기보다는 대민 서비스로 승부해야 하고, 외부 전문가가 쉽게 채용되는 개선을 ‘철밥통 공무원 사회’가 좋아할까요?

특히 모피아(재경부), 건피아(국토부) 등으로 불리는 중앙부처 내의 카르텔일수록 이런 개혁에 냉소적이기 쉬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번 그 ‘X피아’의 일원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평생 권력과 부가 보장되니 말입니다.

내가 만약 어느 부처의 실권자(부처 내 ‘호랑이’)라서 X피아의 중핵이라면 이 대통령의 지시를 반드시 무시해야만 합니다. ‘이 기안은 나 호랑이의 지시에 따라 기안됨’을 명기하거나, ‘세 가지 기안 중 호랑이인 내가 그 중 하나를 골라 책임짐’이라고 알리는 건 바보 짓이기 때문이지요.

이 대통령의 특징 중 하나는 꼭 이뤄야 할 점에 대해선 지시 뒤 여러 번 사후점검한다는 게 있습니다. 쉽진 않겠지만, 대통령의 끈질긴 사후점검으로 품의 시스템의 개혁이 이뤄지길 기대해봅니다. 또한 이에 대한 국민 일반의 끈질긴 관심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책임소재를 뭉개는 품의 시스템이 개혁되지 않으면 국민을 개돼지 취급하는 ‘X피아 천국’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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