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사사(社史)⑤] “건강한 국민만이 나라 되찾아”…유일한 박사 민족정신 잇는 유한양행

이성호 기자 2024.04.03 09:45:01

나라 잃고 질병에 신음하는 동포들 목도
잘 나가던 미국 사업 접고 제약사 설립
무장항일운동에 참여해 조국독립에 헌신
인재양성 꿈…반세기 동안 장학사업 이어

 

1932년 유한양행 신문로 사옥. (사진=유한양행)

급변하는 경제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한길을 걸어온 기업들이 있다. 이에 CNB뉴스가 국내 대표적 장수(長壽) 기업들의 태동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과정을 짚어보고 미래 비전을 소개하는 <미니사사(社史)> 시리즈를 연재 중이다. 이번 편은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정신을 토대로 창업한 100여년 역사의 ‘유한양행’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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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국민만이 잃었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

이는 1926년 6월 유한양행 설립 당시 식민지 민족의 어려운 현실을 직시한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신념이다. 창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우수한 의약품을 생산해 국민의 건강과 행복 증진, 나아가 인류의 보건 향상에 기여하는 일은 유한양행의 가장 중요한 기업이념이 됐다.

유일한은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1895년 1월 15일 평양에서 아버지 유기연과 어머니 김기복의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4~1905년 러일전쟁 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토병합이 획책되고 있는 가운데 기독교인으로서 서양문물과 개화사상에 눈뜬 아버지는 맏아들을 미국으로 보내기로 결심했다.

대한제국의 순회공사인 박장현을 따라 당시 나이 9세에 미국으로 건너간 유일한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초등학교, 이후 네브라스카주 커니농장의 한인소년병학교를 거쳐 헤이스팅스고등학교를 다녔다.

신문 배달 등으로 학비를 벌었고 미식축구 선수로도 활약했으며 장학금도 받았다. 1916년에 미시간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해 3.1 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졸업반이던 유일한은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서 재미 한인대표로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하는 결의문’을 공동 작성하고 낭독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상학을 전공하면서 자본주의 이론을 배웠고, 졸업 후에는 한동안 제너럴 일렉트릭회사에서 회계업무를 맡으면서 실무를 익혔다.

 

유일한 박사의 생전 모습. (사진=유한양행)

그러다가 회사를 나와 자업(自業)을 시작했다. 그 자업이란 숙주나물 장사였다. 당시 미국에는 많은 중국요리점이 있었고 만두에는 반드시 숙주나물을 사용, 미국인들도 이를 즐겨 찾고 있었다. 하지만 현지에서는 이를 생산하는 곳이 없었던 것. 유일한은 신선도를 해치지 않고 숙주나물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열처리법을 개발하면서 장사에 성공하게 된다.

수요가 늘어나자 그는 대학 동창과 함께 1922년 생산공장을 건설해 ‘라초이’라는 식품회사를 설립했다. 이때 나이 27세였다.

라초이 식품회사는 날로 번창했고 제품은 디트로이트, 시카고 지역만이 아니라 펜실베니아, 뉴욕에까지 알려져 주문이 쇄도했다.

그러던 중 유일한은 1925년 사업차 귀국했을 때 국권을 침탈당한 채 빈곤과 질병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동포들의 현실을 보며 이를 타개하겠다는 결심을 품게 된다. 1926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건강한 국민만이 장차 교육도 받을 수 있고 나라도 찾을 수 있다”라는 신념으로 국민 건강과 직결되는 제약업을 선택, 민족기업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창립초기 로고 버들표. (사진=유한양행)

귀국 당시 미국에서 교류하던 서재필 박사는 “버드나무처럼 무성히 번성하라”는 의미로 영애가 조각한 버드나무 목각화를 선물로 줬고, 이는 현재 유한양행의 기업상징물인 ‘신용의 상징, 버들표’의 기원이 됐다.

유한양행은 국민 건강에 도움이 되는 우수의약품을 국내에 도입하는 것은 물론 1933년 ‘안티푸라민’을 개발하는 등 독자적인 근대식 제약기업으로 발전했다.

특히, 조국에서 기업가로 새롭게 출발한 유일한은 1936년 개인소유였던 유한양행을 주식회사로 전환함으로써 ‘기업은 사회의 소유’라는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1941년 미 남가주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유일한은 조국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육군전략처(OSS)에서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는 김호를 비롯한 재미 독립운동가들과 힘을 합해 로스엔젤레스에 ‘한인국방경위대’를 편성하기도 했다. 이후 부대 이름을 ‘맹호군’으로 해 1942년 2월 29일 임시정부 군사위원회의 인준을 받았다.

1945년 1월 1일~29일까지 12개국 대표 160명이 버지니아주 핫스프링에 모여 개최한 태평양문제연구회 총회에 공동 한국 대표로도 나서 국제사회에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도 했다. 유 박사는 OSS의 비밀 침투작전인 냅코(NAPKO) 작전에도 참여했는데, 이때 50대의 나이에도 고된 훈련까지 직접 수행할 정도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광복 후 국내외 정세를 살피던 유 박사는 1946년 7월 귀국해 초대 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하기도 했고 유한양행을 재정비했다. 1948년에는 스탠퍼드대학원에서 국제법도 수학했고 회사는 1953년 휴전 이후 성실한 우수의약품 생산업체로 우리나라 제약업계를 선도하는 민족제약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1958년 유 박사는 ‘유한의 정신과 신조’를 스스로 만들어 발표했다. “가장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게 도움을 주고, 각 개인의 자발적인 노력과 성실”을 강조한 내용으로 조국과 사회 그리고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담은 경영철학을 정립했다.

이렇게 하기 위해 첫째 경제수준을 높이며, 둘째 한결같이 진실하게 일하고, 셋째 각자와 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하자 그러므로 각 책임인들은 항상 참신한 계획과 능동적인 활동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기조 아래 1960년대에 들어 유한양행은 급격한 산업화에 발맞춰 현대적 설비의 영등포 공장을 준공하는 한편, 국내 제약업계 최초의 주식상장, 전문경영인체제 확립 등 고도성장의 발판과 함께 선진경영 기반을 탄탄히 구축해 간다.

 

유한양행 본사 전경. (사진=유한양행)

 


“회사 주인은 직원”…업계 최초 종업원지주제 도입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가 한국 경영사에 보기 드물게 모범적인 경영인으로 기록되고 있다는 점이다. 유 박사는 기업은 사회적인 공기(公器)로 사회 전체의 발전을 위해 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기업의 임무이며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1962년 제약업계 최초로 주식상장을 통해 기업을 공개했으며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 실천에 앞장섰다. 또한, 그에게 기업활동은 그 자체가 교육사업이며 공익사업이었다. 1957년 고려공과학원, 1960년에 유한중학교, 유한공업고등학교 등 평생의 숙원인 교육사업의 학교를 세웠다.

나아가 교육장학사업·사회공헌사업 등을 항구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1970년에는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을 발족했다. 1965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한 유 박사는 1971년 3월 11일 76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어갔다.

정부에서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해 사회공익에 크게 기여한 업적을 기렸다. 유 박사는 유언장을 통해 모든 소유 주식을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함으로써 유한양행의 기업이윤은 사회공익사업을 위해 쓰여지도록 시스템이 구축됐다.

 

지난 3월 11일 창업자 故 유일한 박사 영면 53주기 추모식 모습. (사진=유한양행)

 


‘기업의 사회적 책임’ 실천한 선각자



“기업에서 얻어진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되돌려줘야 한다”

유일한은 국내 굴지의 제약회사로 성장시킨 뛰어난 기업가였지만 단 한푼이라도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꺼렸으며, 타계할 때는 전 재산을 가족에게 상속하지 않고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이를 통해 조성된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은 1976년 장학사업 등 사회사업을 위한 공익재단법인 ‘유한재단’과 우수 기술인재 양성을 위한 학교법인 ‘유한학원’으로 분리돼 현재까지 활발한 사회공헌사업을 펼치며 유 박사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이처럼 소유를 대물림하지 않고 사회 발전에 쓰도록 한, 이른바 ‘전 재산 사회 환원’이라는 미증유의 조치는 오늘날 유한양행이 추구하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의 뿌리가 되고 있다.

더불어 유 박사는 1969년 경영 제일선에 은퇴하며 혈연관계가 아닌 회사 임원에게 사장직을 물려줘 전문경영인 등장의 길을 여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특히, 투명경영과 성실납세는 기업 경영의 제1원칙이다. 유한양행은 성실납세 공로 1968년 3월 ‘세금의 날’을 맞아 업계 최초로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있어 가장 기본이 납세이며 기업활동을 통해 이뤄지는 부의 축적은 반드시 성실한 납세를 통해 국가에 되돌려져야 한다”는 유 박사의 지론이다. 성실한 납세는 곧 국가 발전의 바탕이 되기에 기업활동을 통한 이윤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것은 기업이 국가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 성실한 납세는 유한양행에 있어 애국의 표현이며, 기업이념이다.

2024년 현재 유한양행은 사원수 2004명(2023년 12월 31일 기준)에 자산 2조8137억원, 자본금 778억원, 매출액 1조8589억원(2024년 연결기준)의 굴지의 제약사로 자리하고 있다. 주요 투자사는 유한킴벌리, 한국얀센, 유한메디카 등 65여개사이며 충북 오창 공장, 용인 기흥연구소 및 전국 27개 지점 및 영업소를 갖추고 있다.

유한양행은 핵심가치를 보존하며 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영속기업으로 발전해 나감은 물론, 기업의 가치를 사회와 함께 나누며 사회적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는 위대한 기업이 될 것이라는 각오를 다지며, 혁신 신약과 새로운 사업을 통해 인류의 건강과 행복한 삶에 이바지하는 글로벌 기업으로의 도전을 꾀하고 있다.

한편, 유한양행과 유한재단·유한학원은 매년 유일한 박사의 기일에 추모행사를 갖고, 이를 통해 창업 당시부터 계승해 온 유일한 박사의 애국애족 정신과 숭고한 기업이념을 되새기는 계기로 삼고 있다.

올해에도 지난 3월 11일 경기도 부천시 유한대학에 소재한 유일한 기념홀(윌로우 하우스)에서는 유일한 박사 제53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조욱제 유한양행 사장은 “유한인 모두는 박사님의 이 고귀하고 값진 가르침을 바탕으로 2년 남은 유한 100년사를 창조하고 글로벌 50대 제약기업이라는 우리 목표와 Great&Global의 비전을 달성하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해 하늘에 계신 박사님께서 자랑스러워 하실 수 있는 인류의 건강과 행복에 이바지하는 기업으로 끊임없이 정진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CNB뉴스=이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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