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주주 소유·전문CEO 책임경영 ‘조화’
한미약품그룹, 한국형 머크 모델 추진
“소유·경영 분리가 기업 미래 경쟁력”
한미가 가져올 ‘나비효과’…재계 관심
기업거버넌스포럼의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구조 개선 권고 등을 계기로 대주주 오너 일가로부터 자유로운 전문경영인체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 특히 국내 제약업계 ‘빅5’ 중 하나인 한미약품의 독자경영 선언은 제약업계를 넘어 재계 전반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CNB뉴스가 한미약품 사태가 가져온 나비효과를 들여다봤다. (CNB뉴스=도기천 기자)
“수백년 된 주식회사의 역사를 가진 선진국들과 달리 기업역사가 100년도 되지 않는 우리나라는 창업주 일가가 ‘회사가 내 것’이라는 사고를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미그룹 송영숙 회장이 자신의 지분을 우호세력(신동국)에게 양도하면서까지 전문경영체제에 대한 진정성을 보였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오너가의 온갖 전횡으로 얼룩진 한국 재계에서 한미약품그룹이 새로운 지배구조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국내 경제계에 신선한 자극이 될 것이다”
-<한국재벌사> 저자 이한구 한국재벌연구소장-
최근 재계에서는 51년 역사의 한미약품이 오너 1인이 지배하는 지주회사와 차별화된 ‘전문경영인 중심 경영’을 선언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한미그룹 창업주 임성기 회장의 부인이자 현재 그룹을 이끌고 있는 송영숙 한미그룹 회장이 지난 7월 “임성기 선대 회장의 뜻을 가장 잘 아는 두 대주주(송영숙·신동국)가 다음 세대 경영은 전문경영인이 맡고 대주주들은 이사회를 통해 이를 지원하는 선진화된 지배구조로 가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게 됐다”고 밝히면서 시작된 한미약품의 독자적인 전문경영인 체제 구축이, 현재는 경영권 분쟁으로 마무리되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 시도만큼은 매우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송 회장의 뜻에 따라 전문CEO인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는 지주사로부터의 독자경영을 추진하고 있다. 경영관리본부에 인사·법무 조직을 별도로 신설하는 등 그룹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박 대표의 의지는 일부 오너가 지배하는 지주회사의 위법적 반대에 부딪혀 난항을 겪고 있다. 조만간 열릴 이사회, 주주총회 등 넘어야 할 산이 높다.
박 대표는 제약 전문가로서 쌓아온 30년 경험과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미약품의 신성장 동력을 이끌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연구개발(R&D) 부문에서 한미약품의 차세대 핵심 성장동력인 비만 신약 프로젝트(H.O.P)를 속도감 있게 추진하고, 항암·비만대사·희귀질환 분야의 독보적 연구 성과들을 해외 학회에 잇따라 발표했다. 국내 제약사 최다 규모인 30여개 혁신신약 파이프라인을 갖추고, 여기서 발생한 탁월한 연구 성과들을 연이어 선보이며 회사의 미래가치를 높여가고 있다. 업계에서는 한미약품의 다양한 핵심 프로젝트들이 박 대표 체제에서 더욱 구체화 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박 대표는 30여년간 한미약품에 몸담으며 임성기 선대 회장의 신임을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1993년 한미약품 제제연구센터 연구원으로 입사해 한미약품 상무이사와 전무이사(팔탄공장장), 한미약품 제조본부장(부사장)를 거쳤다. 지난해 3월 한미약품 대표이사·부사장으로 선임된 데 이어 올해 3월 사장으로 승진했다. 박 대표 취임 후 한미약품은 분기마다 역대 최대 실적을 갱신하며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머크식 지배구조 핵심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
송 회장과 박 대표가 꿈꾸는 전문경영인체제의 이상적인 모델은 독일 제약 회사 ‘머크’의 경영구조인 것으로 보인다. 아직 구체적인 방안이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평소 송 회장은 “창업자 가족 등 대주주와 전문경영인이 상호 보완하며 기업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송 회장과 뜻을 같이하고 있는 임주현 한미약품그룹 부회장(송 회장의 장녀) 또한 최근 언론을 통해 ‘머크’의 사례를 언급한 바 있다.
머크의 지배구조는 가장 선진적인 가족 경영 형태로 꼽힌다. 1668년 프리드리히 머크가 창업한 이 회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제약사로, 창업 때부터 지금까지 300년 넘는 세월 동안 가족경영을 통해 유지되고 있다.
한국의 재벌 체제에서는 총수 일가가 결정권을 행사하지만, 머크는 이사회와 가족위원회를 통해 주요 사안을 결정한다. 이사회는 가족위원회 일원과 외부전문가가 비슷한 비율로 구성된다.
머크는 경영과 소유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기고 가족들은 감독만 하는 구조다. 전문경영인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 하에 자율적으로 업무를 추진한다. 주요 경영진 가운데 머크가(家)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가족기업으로서 영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가족 보유 주식의 제3자 매각을 금지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한미약품그룹이 머크식 지배구조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이는 국내 최초의 사례로, 재계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현재 국내 재계는 오너 일가 지배구조의 부작용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최근 광복절 특사로 사면·복권된 주요 기업인들을 보면 대부분 오너가(家) 경영인이다.
수백억원대 횡령·배임 혐의로 형기는 만료됐지만 취업이 제한됐던 A 회장, 거액의 배임 혐의로 2018년 12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확정된 B 회장, 그룹의 경영비리 사건으로 2019년 10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이 확정된 C 이사장, 거액의 회사자금을 횡령하고 병·의원 등에 리베이트를 제공한 혐의로 징역 2년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2020년 9월 출소한 D 회장, 횡령·배임과 법인세 포탈 등 혐의로 징역 3년을 확정받아 2021년 10월 만기 출소한 E 회장, 운전기사들에게 상습적으로 갑질한 혐의로 2019년 11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된 F 회장 등 사면·복권된 경제인 12명 중 대부분이 오너 일가다.
이런 가운데 기업지배구조 자문기관인 (사)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지난 15일 국내 1위 기업인 삼성전자에게 “지배주주가 없는 애플·마이크로소프트 같은 선진국형 전문경영인 경영체제로 전환을 준비할 시점”이라고 권고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기술경쟁력뿐 아니라 지배구조 전반에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너가 경영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보니, 한미약품그룹의 실험적 전문경영인 체제 구축을 위한 도전에 재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치열하게 다투는 것으로 보이는 한미약품그룹의 ‘경영권 분쟁’의 이면에는 결국, ‘재벌 독재경영’과 ‘전문경영인 경영’이라는 화두가 자리하고 있다. 한미약품그룹의 경영권 분쟁을 차분히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재계 한 관계자는 CNB뉴스에 “임성기 회장은 평소에도 대주주가 전문경영인을 지원하는 방식의 경영 모델을 여러 지인들에게 말해 왔다”면서 “한미약품그룹의 경영권 분쟁 종식 이후 자리하게 될 한미약품 전문경영인 체제는 업계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 중의 사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CNB뉴스=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