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태의 본질은 한국형 건설 관행
‘짬짜미’ ‘하청의 재하청’이 불러온 결과
입찰담합 없애고 발주처 책임 강화해야
‘LH 전관’ 탓만 하다간 큰 참극 맞을수도
(CNB뉴스=도기천 편집국장)
“LH 전관이 근무하는 업체와의 용역계약 절차를 전면 중단하고, 이권 카르텔 혁파 방안을 조속히 마련하라”
지난 8월 14일 파라과이 출장 중이던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현지에서 이한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장에게 이같이 지시했다. ‘전관(전직관료)’으로 불리는 LH 퇴직자가 취업한 업체의 설계·감리 부실이 ‘순살아파트(철근누락) 사태’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자, 전관들이 재취업한 업체와 진행 중인 모든 프로젝트를 전면 중단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이후 계약파기에 따른 손해배상청구 및 배임 문제, 원 장관의 즉흥적인 태도 등이 국회에서 논란이 되자 국토교통부가 ‘계약 취소가 아닌 이행 절차 중단’이라며 톤 조절에 나섰지만, 이번 사태의 원인을 ‘전관 카르텔’로 인식하는 원 장관의 태도는 변함없어 보인다.
원 장관은 LH-국토부 긴급회의에서 “전관 카르텔은 공공의 역할에 대한 배신”이라고 수위를 높였고, 국토부는 △LH 퇴직자의 취업제한 대상 기업 확대 △LH 퇴직자 재취업 및 전관 업체 데이터베이스(DB) 구축 등을 담은 ‘건설 카르텔 혁파 방안’을 이달 중 발표한단다.
과연 전관과의 고리를 끊어 내면 한국의 아파트가 안전해질까?
결론부터 말하면 ‘번지수’가 틀렸다. 일단, LH의 설계·감리용역업체 선정 과정부터 따져보자.
LH의 업체 선정은 모두 관련 법령에 의해 이뤄진다. 설계업체의 경우, 수의계약이 아닌 경쟁(공모)방식에 의해 정해진다. 지난 2021년 LH혁신안 발표 이후 심사위원을 전원 외부전문가로 채우는 등 투명성도 강화됐다. 감리용역 또한 2019년 건설기술진흥법 시행령 개정에 따른 종합심사낙찰제 방식의 공개 경쟁입찰로 이뤄지고 있다. 즉, LH 퇴직자라고 심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닌 것이다.
이번 사태는 LH 직원들이 전관업체에 일감을 몰아주고 대가를 챙긴 뇌물 사건이 아니다. 누군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철근을 빼돌리다 들킨 횡령 범죄도 아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법당국의 수사에서도 이런 혐의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문제의 본질은 발주처로부터 공사를 수주받은 업체들이 다른 업체에 하청을 주는 구조가 반복되면서 벌어진 ‘한국형 건설 관행’에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설계용역업체들 또한 중요한 도면 작성을 다른 업체에 맡겼다가 결국 부실시공을 초래했다.
일명 ‘짬짜미’로 불리는 입찰 담합도 건설업계의 오랜 병폐다. 검찰은 해당 업체들이 내부 순번을 정해두고 돌아가며 LH와 조달청이 발주한 일감을 수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나마 국토부와 LH는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특별점검단을 만들어 이번에 사고가 난 무량판 구조로 지은 전국의 LH 사업장을 전수조사했다. 총 102개 단지 중 20곳에서 부실이 발견됐다.
하지만 민간 아파트들은 현황조차 파악하기 힘들다. LH가 발주한 공공 아파트는 대부분 지하주차장 건축 과정에서만 무량판 구조를 사용했지만, 민간 아파트는 주거 공간에도 무량판 구조를 부분적으로 도입한 경우가 많기 때문.
국토부는 무량판 구조를 적용한 민간 아파트 293개 단지에 대한 안전점검을 진행 중이지만, 전문가들은 부분적으로 무량판이 적용된 사례까지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규모가 클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얼마나 더 많은 부실시공이 발견될지 모른다. 그때도 국토부는 ‘전관 카르텔’만 운운하고 있을 것인가? 이는 눈앞의 위기를 모면할 국면전환용은 될지 모르겠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된 답을 찾기 바란다.
우선, 하청업체(용역사)들 간의 입찰 담합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강력한 방안을 내놔야 한다. 입법이 필요한 사안이라면 정부-국회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
또한 발주처가 용역사를 선정한 뒤 계약대로 이행하고 있는가를 책임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이번처럼 부실시공이 발생하면 용역사 뿐 아니라 발주처도 법적 책임을 지도록 하자는 것. 이리되면 ‘원청→하청→재하청’으로 이어져 부실을 불러오는 악순환의 고리가 어느 정도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시민단체들이 주장하고 있는 ‘수분양자의 알권리’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분양 계약 시 설계도면, 자재 종류 등을 계약서에 첨부하고, 감리보고서를 공개해야 한다. 건축주나 다름없는 분양권자들이 건축 과정 전반을 감시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자는 것이다.
이번 사태는 결국 무량판 구조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는 한국 건설업계의 무능과, 관행이라는 이름 하에 가려진 오랜 병폐가 빚은 참극이다. 이 구조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다음에는 주차장이 아니라 건물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삼풍백화점을 벌써 잊었나? LH 전관 탓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CNB뉴스=도기천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