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이어온 창업정신, 오늘날 경쟁력의 뿌리
구 회장 취임후 확 바뀐 LG…시총 300조 눈앞
‘선택과 집중’ 과감한 도전…미래성장 토대 마련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지난 5년은 ‘선택과 집중’으로 요약된다. 2018년 6월 고(故) 구본무 선대 회장의 타계로 당시 40세 나이에 그룹 총수 자리에 오른 그는 일각의 우려를 뒤로 한 채, 주력이던 휴대폰 사업를 접고 배터리에 올인하는 등 과감한 경영혁신을 추진했다. 그 결과 LG그룹은 구 회장 취임 후 5년 동안 시가총액 3배 증가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특히 구 회장이 돋보이는 것은 ‘인화(人和)가 기업경영의 근간’이라 강조한 고(故) 구인회(1907~1969) 창업주의 정신을 잇고 있다는 점이다. (CNB뉴스=도기천 기자)
“놀라운 파격의 연속이다. 수십년 걸릴 일을 단 5년 만에 이룬 것 같다.” (한 대기업 임원)
지난달 취임 5주년을 맞은 구 회장이 그간 펼쳐온 사업혁신 과정은 전광석화(電光石火)에 비유된다.
그는 취임 직후 임직원들에게 ‘회장’ 대신 ‘대표’로 불러달라고 요청하며 변화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임직원들의 옷차림은 정장 대신 비즈니스 캐주얼 차림으로 바뀌었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구 회장, 아니 구 대표와의 소통이 이뤄졌다.
유튜브, 웹엑스, 줌, 팀즈, AI챗봇 등 IT 기반의 소통 채널이 꾸준히 확장되어왔으며, 젊은 직원에게 배워나가자는 ‘리버스 멘토링’ 제도, 임직원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아이디어 경진대회’ 등도 자리를 잡았다. 회장이 정장 차림으로 도열한 임원들과 서열 순으로 악수하던 예전 모습은 이제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다.
특히 소통 경영은 현장에서 빛을 발했다. 구 회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유로운 복장으로 캠퍼스(생산기지)와 연구소를 누비며 일선 직원들과 만나고 있다. 최근에는 그룹 차원의 인공지능(AI) 연구 허브인 LG AI연구원과 바이오 분야 연구개발(R&D) 중추인 충북 오송 LG화학 생명과학본부, 클린테크 관련 기술 연구 거점인 서울 마곡 LG화학 R&D연구소 등을 잇따라 방문하며 미래 사업을 직접 챙겼다.
인사에 있어서는 순혈주의 전통이 완전히 사라졌다. 4대그룹 상장사 중 처음으로 오너 일가가 아닌 여성 전문경영인(이정애 사장·박애리 부사장)을 CEO로 선임했으며, LG AI연구원에는 2020년 세계적인 AI 석학 이홍락 미국 미시간대 교수의 최고AI과학자(CSAI) 영입 이후 글로벌 석학의 합류가 잇따르고 있다. 2018년부터 올해 5월까지 LG로 영입된 임원급 외부 인재는 100여명에 달한다.
2018년 29명이었던 여성 임원도 올해 61명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지난해 인사에서는 114명의 신임 상무 가운데 1970년 이후 출생이 92%를 차지했다.
구광모식 ‘선택과 집중’ 통했다
이처럼 젊고 개방적인 기업문화 속에서 구 회장은 대대적인 사업재편을 진행해나갔다. 집중할 사업과 포기할 사업을 다시 정한 것.
2019년 LG디스플레이의 조명용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사업과 LG유플러스의 전자결제 사업을 정리했고, 2020년에는 LG화학의 액정표시장치(LCD) 편광판 사업을 중국에 매각했다.
특히 2021년에는 LG전자가 1995년 LG정보통신으로 사업을 시작한 지 26년 만에 휴대폰 사업(MC사업본부)을 철수해 재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LG전자는 휴대폰 사업을 접은 이듬해 1분기에 분기 기준 역대 최고인 21조1114억원 매출과 1조8805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재계에서는 이 사례를 ‘신의 한수’로 평가한다. 한 증권가 애널리스트는 “주력사업의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휴대전화 사업까지 유지했다면 재무건전성이 더 나빠질 수 있었다. 고전을 면치 못했던 LG전자가 극적인 반전에 성공한 데는 자존심보다 성과를 우선시하는 구 회장 특유의 실용주의 정신이 주효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반면 구 회장은 OLED, 이차전지 등 성장 사업에는 아낌없이 베팅하고 있다.
2026년까지 106조원을 각 분야에 투자할 계획인데 이중 40%인 43조원이 ▲배터리·배터리소재 ▲전장 ▲차세대 디스플레이 ▲AI·데이터 ▲바이오 ▲친환경 클린테크 등 미래성장 분야에 집행된다.
실례로 LG화학은 연간 12만t 규모의 양극재(이차전지 핵심소재)를 생산 중인데, 여기에 더해 경북 구미 생산라인을 올해 완공할 예정이다. 또 세계 1위 코발트 업체인 중국 화유코발트와 손잡고 2028년까지 1조2000억원을 투자해 새만금산업단지에 양극재 원료인 전구체 공장을 짓는다. 이를 기반으로 지난해 5조원 가량을 기록한 2차전지 관련 매출을 2027년에 20조원 규모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LG전자는 전장(VS)사업본부의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자회사 ZKW의 차량용 조명 시스템, 합작법인 LG 마그나 이파워트레인의 전기차 파워트레인 등 삼각편대를 앞세워 전장 부품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바이오 소재를 활용한 친환경 플라스틱, 폐플라스틱 재활용 기술 등 클린테크 분야 투자도 꾸준히 늘려가고 있다.
이미 가시적인 성과도 거두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전기차 배터리 부문에서 지난해 매출 25조원, 영업이익 1조원을 기록하며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배터리 분야 수주 잔고는 지난해 말 기준 385조원에 달한다. LG전자·LG디스플레이·LG이노텍의 올해 전장 분야 수주 잔액도 120조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프리미엄TV 시장에서는 LG전자와 LG디스플레이가 수년간 공을 들여온 OLED가 ‘대세’로 주목받고 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LG그룹 시가총액 규모는 구 회장 취임일인 2018년 6월 29일 기준 88조1천억원에서 지난달 중순 기준 258조원으로 무려 3배나 늘었다.
‘사람 존중’ 창업이념, 고객 가치로 승화
특히 구 회장이 돋보이는 것은 이 같은 성과의 비결이 ‘가치 경영’에 있다는 점이다.
구 회장의 소통 경영은 ‘인화(人和)’를 기업경영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LG가(家)의 전통과 닿아 있다.
LG 창업자인 연암 구인회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31년 경남 진주에 ‘구인상회’라는 포목상을 경영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구 창업주는 “내 한 몸 지키는 것보다 나라를 되찾고 겨레를 살리는 것이 우선”이라며 선뜻 자금을 내놨다고 한다.
이런 정신을 계승해 해방 직후인 1947년 설립된 락희화학공업(현 LG그룹의 모태)은 거대 기업으로 커나가는 동안 ‘정도(正道)경영’을 지켜왔다. 수많은 재벌가에서 형제 간, 부모자식 간 분쟁이 판을 쳤지만 LG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
‘구광모식 소통 경영’은 이처럼 사람을 존중하는 LG가의 오랜 기업 이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구 회장은 고객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무엇보다 강조한다. 2019년 첫 신년사에서 ‘LG가 나아갈 방향은 고객’이라는 지향점을 제시한 이후 매년 신년사를 통해 한층 구체화한 고객 가치 철학을 전하고 있다. 구 회장은 작년 9월 사장단 워크숍에서 “미래 준비는 첫째도 둘째도 미래 고객의 관점에서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쟁력의 또다른 한축은 ‘상생’이다. 이 또한 겨레와 함께 살고자 했던 LG가의 창업정신과 이어져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LG전자의 ‘상생결제’다. 이는 1차 협력사에 지급한 물품 대금이 2차 이하 협력사까지 이어지도록 지원하는 방식이다. LG전자는 1차 협력사가 상생결제를 할 경우, 금융지원·포상·평가가점 부여 등 다양한 인센티브를 주고 있다.
친환경·사회적 기업을 발굴∙육성하는 통합 지원 플랫폼 ‘LG소셜캠퍼스’, 미래 전략적 파트너를 육성하는 ‘스타트업 몬스터’, 농어촌·도서벽지 청소년들을 위한 ICT 체험교육 ‘AI지니어스’ 등도 대표적인 상생프로그램이다. 차세대 꿈나무와 손잡고 함께 미래를 개척하자는 취지다.
LG 출신의 한 대기업 임원은 CNB뉴스에 “LG의 급격한 성장은 결코 구 회장 혼자 이룬 게 아니다. 오랜 세월 이어져온 고객·협력사에 대한 책임경영 정신이 구 회장 특유의 실용주의와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내게 된 것”이라며 “ESG경영이 확산되고 있는 현 추세와 맞물려 그룹의 성장세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CNB뉴스=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