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3세 경영의 닻을 올린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친환경(수소·전기)차의 비전을 재차 천명하면서 4대 그룹 간의 일명 ‘배터리 동맹’이 속도를 내고 있다. 이를 두고 비즈니스 차원을 넘어 새로운 재계연합체가 성사될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과거 재계의 구심이었던 전경련의 몰락, 대부분 재벌기업이 세대교체를 이룬 점 등 분위기는 충분히 무르익은 듯하다. 과연 누가 총대를 멜까? (CNB=도기천 기자)
정의선號 출범…4대그룹 ‘배터리 동맹’ 가속
‘경제 3법’ 계기로 재계연합 필요성 수면 위
재벌 시선·경총과의 관계 등 난제도 수두룩
재계에서 새로운 연합체론이 회자되는데는 여러 사안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선 현대차그룹이 주도하는 미래차 사업에서 가능성이 점쳐진다.
문재인 정부는 시스템반도체, 바이오헬스, 미래차 등 3대 신성장 산업을 한국판 뉴딜의 핵심분야로 육성하고 있는데, 이중 미래차는 현대차그룹을 중심으로 제계 1~4위 기업집단이 서로 협력할 수 있는 고리다.
정 회장은 지난 14일 취임 후 첫 공식행보로 정부가 주도하는 수소경제위원회 회의에 민간위원으로 참석하는 등 미래차 사업 확장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는 취임 메시지에서 핵심 성장축인 자율주행, 전동화, 수소연료전지 분야에서 글로벌시장 지배력을 확대하겠다고 천명했다.
이 중에서도 전기차는 삼성, LG, SK와의 협력이 필수적인 분야다.
현대·기아차는 2025년까지 총 44종의 친환경 차를 선보일 예정인데, 이 중 절반이 넘는 23종이 순수 전기차다. 현대차의 경우 2025년 전기차 56만대를 판매해 친환경차 분야 세계 3위로 올라선다는 목표를 갖고 있으며, 기아차는 2029년까지 세계시장에서 전기차 판매 비중을 25%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이것이 현실이 되려면 안정적인 전기차 배터리 확보가 필수다. 핵심 부품인 배터리의 수급이 원활해야 전기차 시장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기 때문. 세계각국의 전기차 수요 증가로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는 배터리 공급에 적신호가 켜진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LG화학과 삼성SDI, SK이노베이션 등 3사는 중국의 CATL, 일본 파나소닉 등과 함께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는 배터리 1회 충전으로 800km 주행하고 1천회 이상 재충전할 수 있는 ‘석출형 리튬음극 기술’을 최근 개발한 상태다.
정 회장이 지난 5월~7월 사이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잇따라 만나 전기차·배터리 사업에 관해 논의한 것도 이 때문이다.
관련업계에서는 정 회장이 현대차그룹의 총수로 올라선 만큼, 다른 대기업과의 협력이 더 속도를 낼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그가 그동안 보여온 과감한 혁신 행보에 기인한다.
정 회장은 최근 삼성과 SK, LG의 배터리 사업장을 차례로 방문해 차세대 사업 협력을 논의했는데, 격식을 중시하던 과거 재벌가에서는 볼 수 없던 장면이다.
현대차 고유의 수직적 사내 풍토를 수평적·실용적으로 바꾼 것도 그렇다. 정 회장은 2018년 9월 그룹 수석부회장에 오른 후 유연 근무제, 복장·점심시간 자율화 등을 통해 직원 개개인의 자율성을 확대했고, 이메일 등의 비대면 보고를 통해 코로나19 시대에 빠르게 적응했다. 직원 호칭은 매니저와 책임 매니저로 단순화하고, 승진 연차 제도도 없앴으며, 순혈주의를 깨고 외국인 인재들로 요직을 채웠다.
재계 관계자는 CNB에 “정 회장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실용주의자로 알려진데다, 정주영(현대그룹 창업주) 가문 특유의 추진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에서 다른 기업과의 미래차 사업 협력에 속도가 붙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치권-재계 ‘소통 창구’ 절실
더 나아가 이런 흐름이 단순히 비즈니스에만 한정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재벌기업을 옥죄는 각종 법안이 통과를 앞두고 있어 기업인들이 한목소리를 내는 게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현재 정부·여당은 ‘공정경제 3법’으로 불리는 상법 개정안, 공정거래법 개정안, 금융그룹 감독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공정경제 3법은 야당인 국민의힘에서도 큰 반발이 없는 상태라 사실상 법개정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 외에도 국회에는 징벌적손해배상제, 집단소송법,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 3백개가 넘는 기업규제법안이 대기 중이다.
재계는 자칫 경영권을 침해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 반대하고 있다. 특히 삼성 현대차 SK LG 효성 롯데 GS 한화 LS CJ 두산 한진 금호아시아나 대림 신세계 아모레퍼시픽 등 총수일가의 지배력이 큰 기업집단은 더 그렇다.
그럼에도 재계에는 이렇다할 구심점이 없는 상태다. 과거에는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을 중심으로 정치권과 활발하게 소통했지만, 지금 전경련이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박근혜 정권 때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이후 적폐 취급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전경련 역할을 대신하고 있지만 이 역시 한계가 뚜렷하다. 회원사 대부분이 중소·중견기업다 보니 재계를 대표하는 창구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재벌기업들 입장에서는 새로운 중심축이 절실한 상황이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CNB에 “정부와 국회가 강력한 기업규제법안들을 밀어붙이고 있어 경제단체별로 대응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며 “특히 청와대를 비롯해 정치권이 마련한 각종 행사, 간담회 등에 재계 총수들이 호출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는데, 이때 주요그룹의 입장을 한데 모아서 전달할 필요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도타운 젊은 총수들…총대는 누가?
4대 그룹이 모두 40~50대 ‘젊은 총수’로 바뀌었다는 점도 새로운 연합체 결성에 무게를 싣고 있다.
이번에 현대차그룹 사령탑에 오른 정 회장은 올해 50세이며, 삼성그룹을 이끄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52세다. SK그룹의 최태원 회장이 59세로 최연장자이며, LG그룹 구광모 회장은 40대 초반이다.
이들은 모두 선대 회장 때와 달리 소통과 실용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자율경영 체제를 도입해 수평적 조직 문화를 확산하는 한편 현장경영을 통해 국내외 시장을 직접 챙기고 있다.
서로 간의 친분도 도타운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과 이 부회장은 사석에서 서로를 ‘형’ ‘동생’으로 부르며, 최 회장은 맏형으로 통한다고 한다. 2018년 9월 평양정상회담 경제사절단으로 방북했을 때는 다같이 다정하게 사진을 찍고 사이좋게 백두산에 오르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만약 재계동맹이 현실이 된다면 누가 앞장서서 총대를 멜까.
재계에서는 정 회장과 최 회장을 유력하게 꼽는다. 정 회장은 문재인 정부 뉴딜정책 핵심인 미래차 분야의 최대 협력기업이라는 점에서, 최 회장은 이들 중 최연장자라는 점에서 거론되고 있다. 이 부회장은 국정농단 사건 등의 재판이 진행 중이라 부담이 될 수 있고, 구 회장은 이들 중 나이가 가장 적어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재벌’ 부정적 이미지 극복해야
하지만 재계 연합체의 탄생이 순조롭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이 부회장의 경우, 사법 리스크 때문에 삼성 내부에서도 “앞에 나설 시기가 아니다”는 의견이 나온다.
LG화학이 현대차에 공급한 배터리에 문제가 발생해 전기차 코나가 대규모 리콜에 들어간 점도 단기적으로는 단결 분위기를 해치고 있다. 책임론이 불거지면 배터리 동맹에 금이 갈 수 있기 때문. 여기에다 과거 최순실-전경련 사태에서 비롯된 재벌에 대한 곱지 않은 국민 시선도 부담이다.
4대그룹 계열사의 한 고위관계자는 CNB에 “기업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새로운 이익단체의 필요성이 커진 것은 맞지만 고려해야할 점도 여럿 있다”며 “대기업연합이 곧 재벌연합의 이미지가 되어서는 곤란하며,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와의 관계설정도 필요하다. 아직은 말만 무성한 상태”라고 전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