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나항공 매각 ‘빅딜’이 사실상 무산 수순에 돌입한 가운데, 인수계약을 맺었던 정몽규 HDC현대산업개발 회장, 매도주체인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채권단 대표격인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의 셈법이 복잡하다. 이들 모두 ‘플랜B’를 가동하며 돌파구를 찾고 있지만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는다. 한때 항공업 사상 최고의 ‘윈윈 빅딜’을 자신했던 세 사람이 지금은 각자도생에 나선 이유가 뭘까. (CNB=도기천 기자)
금호산업-현산-산은 ‘네 탓’ 공방
“누가 먼저 플랜B 꺼내나” 신경전
매각 실패시 후폭풍은 세 사람 몫
아시아나항공 매각은 항공업 사상 최대 인수합병(M&A)으로 꼽힌다. 작년 12월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모(母)회사인 금호산업은 아시아나 지분 30.77%를 ‘HDC현대산업개발(현산)-미래에셋대우’ 컨소시엄에 넘겼다. 전체 거래금액은 2조5000억원에 이르며 현산 측은 이중 10%인 2500억원을 계약금으로 지불했다.
당시 현산은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계기로 기존 건설그룹에서 건설, 유통, 레저, 물류를 아우르는 종합그룹으로 발돋움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재계 순위도 33위에서 17위로 수직상승할 것으로 예상됐다. 정몽규 현산 회장은 직접 기자회견을 열고 “건설업을 벗어나 모빌리티그룹으로 도약할 것”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범현대가에서는 현대백화점과 현대오일뱅크, KCC 등이 아시아나항공 유상증자에 참여할 것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저비용항공(LCC) 시장은 아시아나항공 자회사인 에어부산과 에어서울의 추가 매각 가능성을 놓고 술렁거렸다. 항공업은 물론 재계 판도가 바뀌는듯 했다.
하지만 ‘빅딜’은 난타전 양상으로 변질됐다. 당시 계약에 따르면 현산은 계약일로부터 6개월 내인 6월27일까지 잔금을 치러야 하지만 지금까지 이행하지 않고 있다. 이를 두고 재계에서는 양측이 계약파기에 따른 위약금 소송전을 대비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자신했던 정몽규…지금은 골머리
우선 현산은 금호산업과 채권단에게 인수 조건을 원점에서 재검토하자고 요구하고 있다. 8월 중순부터 12주간 재실사를 하자는 것. 코로나19 여파로 아시아나항공 실적이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현산은 지난달 입장문을 통해 “계약을 체결할 당시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인수가치를 훼손하는 여러 사실이 확인됐다. 자체 분석 결과 인수계약 후 아시아나의 불어난 부채가 4조5000억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인수 철회를 위한 ‘명분 쌓기’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미 지불한 계약금 2500억원을 둘러싼 소송전에 대비한 포석이라는 것. 재실사를 통해 계약 때와 다른 결정적 하자가 발견될 경우 계약금의 전부 또는 일부를 돌려받을 가능성이 커지지만, 그냥 있다가는 계약금을 몽땅 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계약서를 수정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설도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아시아나의 적자가 증가한 만큼 애초 계약된 매매금액 보다 낮춰볼 속셈이라는 얘기다.
이런 일련의 추측에 대해 현산 측은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현산 측은 “금호산업 측이 이미 선행조건을 준수하지 않는 등 계약을 위반했기 때문에 계약을 해제하고 계약금 반환 절차를 진행할 수 있음에도 성공적인 거래 종결을 위해 재실사를 요청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렇든 저렇든 계약이 무산되면, 설령 계약금을 돌려받더라도 정 회장은 리더십에 상처를 입게 된다. 앞서 정 회장은 작년 하반기 아시아나 인수전 당시 애경그룹보다 무려 1조원을 높게 써내 고가매입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항공업 업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봤다는 평가였다. 결과적으로 이런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 회장의 입지가 좁혀질 수 있다.
정부로부터 미운털이 박힐 우려도 있다. 고용노동부는 LCC업계 고용유지지원금을 현행 180일에서 240일로 늘리는 등 대량해고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이런 와중에 아시아나항공이 인수 무산으로 대규모 구조조정에 들어간다면 그간의 정부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CNB에 “대부분 LCC가 정부지원금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아시아나 인수마저 무산된다면 그야말로 항공업계는 최악의 국면을 맞게 될 것”이라며 “현산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고 내다봤다.
절체절명 박삼구…어떻게든 불씨 살려야
금호산업은 현산의 주장을 정면 반박하면서도 수위를 조절하고 있다. 판이 깨지면 그룹 자체의 생존이 위협받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금호산업은 “이미 영업, 재무 관련 정보를 현산 측에 충분히 제공했다. 현산이 문제삼는 부분은 거래 계약을 해제할 수 있는 사유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애초 금호그룹은 아시아나를 판 자금으로 그룹을 재건할 심산이었다. 부채비율이 700%에 이르는 아시아나를 현산에 넘기게 되면 인수금액 2조5천억원 중 구주 가격 3200억원 가량을 손에 쥐게 된다.
이를 시드머니(종잣돈)로 삼아 지난해 금호고속이 금호산업 지분을 담보로 산은으로부터 차입한 1300억원을 갚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그룹 재건에 나설 계획이었다.
아시아나항공이 팔리면 한때 재계 7위까지 올랐던 금호그룹은 사실상 금호산업과 금호고속 2개 계열사만 남게 돼 재계 60위 밖의 중견그룹으로 전락하지만, 그룹의 명맥은 튼튼히 이을 수 있다.
금호그룹은 1946년 고 박인천 창업주가 전남 광주에서 중고 택시 2대를 구입해 광주 황금동에 ‘광주택시’란 상호로 사무실을 열면서 시작된 기업이다. 이후 박 창업주 일가는 금호고속과 금호산업을 세워 현대적 개념의 그룹체제를 갖추게 된다.
금호산업은 1960~70년대 경부선과 호남선 고속버스 사업에 뛰어들어 ‘금호 신화’를 창조했다. 이후 토목·건축, 공항·물류시설, SOC, 환경, 주택 등 건설 전 분야에서 큰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금호그룹은 2006년 건설업계 1위인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당시 계열사들로부터 인수자금을 끌어왔는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건설경기가 불황을 겪으면서 결국 그룹이 총체적인 위기를 맞았다. 2009~2010년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가 워크아웃을 신청했으며, 금호석유화학과 아시아나항공은 자율협약에 들어갔다.
다행히 금호그룹은 금호산업을 채권단 손에 들어간 지 6년 만에 되찾아 오는데 성공했다. 당시 박삼구 금호그룹 회장은 금호산업이 매물로 나오자 사재를 털어 인수 실탄을 마련하는 등 온 힘을 쏟았다.
이후 금호산업은 아시아나항공을 비롯해 금호터미널, 금호리조트 등 10개 계열사의 상당 지분을 갖는 등 사실상 그룹의 지주사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고 박인천 창업주의 아들이자 금호그룹의 실질적 오너인 박삼구 회장 입장에서는 가업의 뿌리인 금호산업과 금호고속을 사수하는 게 그룹 재건의 첫단추다. 이는 현 상황에서 아시아나 매각이 성사돼야만 가능한 일이다. 매각 무산으로 아시아나항공이 금호그룹에 남거나 채권단 출자전환을 통해 산업은행이 인수해 사실상 국유화될 경우 그룹 재건은 힘들게 된다.
그렇더라도 박 회장 입장에서 한 가닥 희망은 있다. 항공산업이 기간산업인 만큼 아시아나항공의 경영 위기를 정부가 손놓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란 기대감이다. 그래서 ‘플랜B’는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이끌어내 경영정상화를 이루는 것이다.
아시아나항공, 에어부산, 에어서울 등을 각각 분리매각 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항공업이 고사 위기에 처한 터라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연임 앞둔 이동걸, “담판 짓자” 승부수
한편 현산과 금호산업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해오던 산업은행은 금호산업 쪽으로 기운 모습이다.
산은은 현산의 아시아나항공 재실사 요청을 “과도한 수준”이라며 거절한데 이어, 지난 20일에는 이동걸 산은 회장이 직접 정몽규 현산 회장에게 공식 면담을 제안했다. 현산의 아시아나항공 인수 의지를 최종 확인하기 위해서다.
양자 간 최종 담판이 실패할 경우, 산은은 ‘플랜B’를 가동해야 한다. 산은 등 채권단이 아시아나항공을 직접 관리하면서 시장 상황이 나아지면 다시 매각에 나선다는 시나리오다.
채권단 관리가 시작되면 인력 구조조정이 필수적으로 뒤따를 전망이다. 코로나 여파로 국제선 여객 수요 회복이 요원한 상황인만큼 안전, 정비 등 핵심 인력을 제외한 나머지의 구조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아시아나항공이 대우조선해양의 전철을 밟게 되는 상황이다. 대우조선은 대우그룹 해체로 20년 넘게 산은의 수혈을 받아왔다. 번번이 민영화가 좌절되다가 지난해부터 한국조선해양(현대중공업그룹)이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CNB에 “아시아나항공 매각이 실패하면 산은이 최소 2조원 이상을 투입해야 할 수도 있다”며 “산은 입장에서는 막대한 공적자금 투입에 따른 비난을 감수해야 하며, 이는 다음달 10일 임기가 끝나는 이동걸 회장의 연임에도 적잖은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빅딜이 무산되면 후폭풍은 고스란히 세 사람(정몽규·박삼구·이동걸) 몫이 될 전망이다. 국내 항공업 생사를 가를 운명의 시간은 이미 초읽기에 들어갔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