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파격의 연속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최근 LG의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부친인 구본무 회장의 타계로 작년 6월 그룹의 총수 자리에 오른 구광모 LG 회장(41)은 채 1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빠르게 LG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개혁의 속도는 ‘전광석화(電光石火)’에 비유된다. LG내부에서는 “1년이 10년 같다” “10년 걸릴 일을 10개월 만에 이뤘다”는 말이 나온다. (CNB=도기천 기자)
10년 할걸 1년에? 초고속 개혁
“버릴건 버려” 과감한 취사선택
무역전쟁·그룹재편…산 넘어 산
변화1, “틀을 깨라”
우선 변화는 형식을 깨는데서부터 시작됐다.
LG측에 따르면, 구 회장은 취임 직후 임직원들에게 ‘회장’대신 ‘대표’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구 회장의 직함은 지주사인 (주)LG의 대표이사다. 총수, 회장 같은 존대어 대신 일과 직결된 실용적인 용어를 택한 것이다.
올해 초 개최된 그룹 시무식에서는 종전의 ‘넥타이 부대’가 사라졌다. 회장이 정장 차림으로 도열한 임원들과 서열 순으로 악수하던 종전 모습 대신, 비즈니스 캐주얼 차림의 임직원들이 자유롭게 서로 덕담을 나누며 새해를 맞았다.
또 기존에 400여명이 모여 분기별로 개최하던 임원세미나는 100명 미만 규모의 월별 모임인 ‘LG포럼’으로 전환됐다. 미래 먹거리에 관해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내고 토론하며 ‘세미나’라는 본래 취지에 더 가까워졌다. 이 자리에서 인수합병(M&A) 등 대형 프로젝트들이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상·하반기로 나눠 개최되는 사업보고회도 실용성이 강조됐다. LG의 사업보고회는 상반기엔 중장기 사업 방향, 하반기엔 당해연도 실적을 평가하는 자리로 알려져 있다. 주력 계열사인 LG전자의 경우, 지난 21일부터 사흘간 OLED TV, 자동차 전장, 로봇, 5G 스마트폰 등을 중심으로 성장 전략을 논의했다.
구 회장은 사업보고회를 직접 주재하고 있다. 계열사 CEO 및 사업본부장들과 함께 진행상황을 점검하며 미래전략을 짜고 있다. 형식에 있어서도 발표는 줄고 토론이 늘었다.
변화2, 인적쇄신 ‘속도전’
순혈주의 전통을 깬 과감한 인적 쇄신도 눈에 띈다.
구 회장 취임 후 단행한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파격적인 외부 인재 영입이 단행됐다. LG화학 CEO로 신학철 전 3M 부회장을 세웠는데, 외부인사가 LG화학 수장이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또 ㈜LG의 사업 포트폴리오 전략을 담당하는 경영전략팀장에 베인&컴퍼니 홍범식 대표를, 자동차부품팀장에는 김형남 한국타이어 연구개발본부장을 앉혔다.
또 그룹 총수가 이사장을 맡아왔던 4개 공익재단 이사장 자리를 이문호 전 연암대학교 총장에게 일임했다. 이는 ‘두 마리 토끼잡기’ 전략으로 읽힌다. 구 회장은 경영에 집중하되, 선대 회장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상류층의 도덕적 의무)’ 정신 또한 적극 계승해가겠다는 의미다.
이밖에 사상 최대 규모인 134명의 신규 임원을 발탁하는 등 미래 성장을 이끌 인재풀을 넓히고 있다.
변화3, 구광모式 ‘선택과 집중’
사업추진에 있어서는 과감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최근 LG전자가 스마트폰 국내 생산 중단을 전격 선언하고 생산라인을 베트남으로 이전하겠다고 발표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는 연속적자를 겪고 있는 스마트폰 사업부문에 대한 특단의 조치였다.
또 올레드TV와 인공지능(AI), 로봇, 자동차 부품 등에 주력하고 연료전지사업은 접기로 했으며, LG디스플레이는 OLED조명사업에서 일반용은 철수하고 자동차 후미등 등 사업 성장성이 밝은 분야에 집중키로 했다. LG유플러스가 5G 이동통신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높은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 등을 통해 시장 점유율 확보에 나선 것도 최근 그룹의 공격적인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미래 성장성이 큰 분야에서는 과감한 ‘빅딜’이 이뤄지고 있다. LG화학은 지난달 첨단소재사업 육성을 위해 차세대 디스플레이 핵심 플랫폼인 ‘솔루블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재료기술을 미국 듀폰사로부터 인수했다. LG유플러스는 케이블TV 업체인 CJ헬로비전 인수를 추진 중이다.
변화4, 왕성해진 ‘전투력’
경쟁사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최근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전기자동차용 배터리로 사용되는 2차전지와 관련한 ‘영업비밀 침해’ 의혹을 제기하며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제소했다. 외부에서 영입한 LG화학 신학철 대표이사 부회장이 취임 약 2개월 만에 이런 국제소송전을 주도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만큼, 구 회장의 의중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게 업계 중론이다.
LG전자가 지난 14일 경북 구미사업장에서 개최한 기술설명회에서 삼성전자 QLED TV를 겨냥해 ‘십자포화’를 날린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날 LG측은 “경쟁사의 QLED TV에 해당하는 제품이 과거 SUHD TV였는데 이름만 바꾼 것”이라며 “LG의 신기술이 급성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TV·가전 업계에서 LG전자와 삼성전자 간의 신경전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같은 ‘돌직구’는 사례를 찾기 힘들다. 업계에서는 ‘계산된 도발’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재계 관계자는 CNB에 “재계 서열 4위인 LG가 서열 3위인 SK, 1위인 삼성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셈이라 놀랍다”며 “과거의 LG그룹이 대체로 온화하고 신중한 의사결정 분위기였다면 구광모 회장 체제에서는 전투력과 추진력이 상당히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
ICT업계에서는 구 회장이 미국 로체스터 공대에서 IT(정보기술) 분야를 전공한 후 실리콘밸리에서 실무 경험을 쌓은 만큼,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분야로 꼽히는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5G(5세대 이동통신), 빅데이터, 로봇 등 분야를 꾸준히 확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유망한 사업을 중점 육성하고 있는 최근의 ‘선택과 집중’이 이 분야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LG전자, LG유플러스, LG CNS 등 관련기업들을 중심으로 사업재편이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당장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미국의 보호무역 강화와 원·달러환율 급등, 중국·일본 기업과의 경쟁 심화 등 한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상황을 맞닥트리고 있다.
특히 미국과 중국 간의 무역분쟁은 수출의존도가 높은 우리 기업들에게 최대 리스크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시스템리스크 서베이 결과’에 따르면 국내외 경제전문가들은 미·중 무역분쟁을 한국경제의 최대 리스크로 꼽았다. 자동차 전자부품을 비롯, 각종 가전제품을 수출하고 있는 LG로서는 강대국들의 무역전쟁이 장기화 되면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구 회장 취임 직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구본준 부회장(고 구본무 회장의 동생)의 독립(계열분리)도 큰 과제다.
1947년 설립된 락희화학공업(현 LG화학)을 모태로 하는 LG그룹은 70년 세월 동안 한결같이 ‘장자승계’ 원칙을 지켜왔다. 장자가 경영권을 승계하면 총수의 형제들은 그룹 경영에서 손을 떼고 퇴진하거나 분사하는 게 LG가(家)의 전통이다.
따라서 구본준 부회장 역시 집안의 장자인 구광모 회장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조만간 계열 분리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LG상사와 판토스 등 상사 부문이나 구 부회장이 각별한 애정을 쏟은 LG디스플레이의 사업부문 중 하나가 분리 독립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구 회장의 리더십이 도마 위에 오를 전망이다. 계열분리 과정에서 다시한번 LG그룹을 결속시키고 재정비해야 한다.
재계 고위관계자는 CNB에 “재계 최연소(78년생) 회장다운 빠르고 과감한 결단이 큰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면서도 “밖으로는 보호무역 장벽을 넘어야하는 과제가, 안으로는 그룹의 재편이라는 과제가 동시에 양립하고 있는만큼, 도전의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