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모칼럼] 조선시대 대머리는 상투를 어떻게 틀었을까?

Dr.홍의 무명초 이야기 <40>

이병훈 기자 2015.08.11 10:36:52


요즘 TV 드라마는 제작 스케일이 커지고 소재도 다양해지는 추세다. 대하 사극 역시 이미 많이 알려진 식상한 소재에서 벗어나 고조선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전 시대를 아우르며 신선한 소재와 더불어 그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사극 어디에서도 대머리 남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극 속에 나오는 귀족이나 양반들은 깔끔하게 상투 튼 모습이 대부분이다. 일반 백성들 역시 하나 같이 상투를 틀어 올린 똑같은 모양이다. 저잣거리의 거지들도 치렁치렁한 긴 모발을 휘날리며 빌어먹으러 다닌다.

이 땅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 중에는 정말로 대머리가 없었을까? 당연히 대머리는 존재했다. 하지만 탈모 인구의 비율은 현저히 낮았다.

그 이유는 전쟁이나 노역, 질병 등으로 인해 탈모가 진행되기도 전에 일찍 죽는 남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기름진 육식보다는 채식 위주의 식습관도 원인이다. 과학 기술과 교통 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일상생활 속에서 운동량이 많았던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분명 대머리 남성들은 존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림이나 초상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 비결은 상투에 있었다. 대머리 남성들은 어떻게 상투를 틀었을까?

상투는 일종의 성인식이라 할 수 있다. 길게 딴 머리를 풀어 말아 올리고 관을 씌우는 일종의 의식이다. 조선시대 남성들은 보통 15세를 전후해 상투를 틀었다. 나이가 들어 앞머리에 탈모가 진행되었을 경우 뒷머리를 본 머리에 덧 둘러서 감거나, 옆머리와 뒷머리만으로 원래 위치보다 약간 뒤쪽에 틀었다. 즉 대머리가 상투를 트는 것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풍성했던 모발이 나이 들어 탈모가 진행되면서 대머리가 될 때 그들이 느꼈던 감정은 어땠을까? 지금의 우리와 똑같았을까? 우리 조상들이 대머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잘 표현한 시조 한 대목을 감상해보자.

우리에게 ‘동국이상국집’으로 잘 알려진 고려시대 무신 정권기 최고의 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점점 탈모가 진행되는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며 지은 시조다.

털이 빠져 머리가 온통 벗겨지니 / 나무 없는 민둥산을 꼭 닮았네 /
모자를 벗는다고 창피할까 / 빗질할 생각은 벌써 없어졌네 /
귀밑머리와 수염만 없다면 / 참으로 늙은 까까중 같으리~

글쓴이 홍성재 의학박사/웅선클리닉 원장
의학 칼럼리스트로 건강 상식을 이웃집 아저씨 같은 살가움과 정겨움이 넘치는 글을 써오며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저서로 ‘탈모 14번이면 치료된다’ ‘진시황도 웃게 할 100세 건강비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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