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상관 쓰여요

선명규 기자 2019.10.17 10:12:52

사진=픽사베이

직장 동료가 부당 해고 당할 위기에 처했다. 어찌어찌 얼굴만 익힌 이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 전 몰아친 가을 태풍 때 이웃의 차가 쓰러진 나무에 뭉개졌다. 내 일이 아니어서 괜찮다, 라며 잠자코 나서지 않는다. 나와 상관없으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신경 쓰인다. 상관없지만 신경 쓰인다. 상관 쓰인다.

김소연의 산문집 ‘나를 뺀 세상의 전부’를 읽다가 한 에피소드에서 엷은 미소가 번졌다. 어느 식당 안. 요란하게 물들인 머리카락에 귀며 코며 주렁주렁 장신구를 단 사람들이 대화를 하고 있다. 주변 사람 아랑곳없다는 듯이 고성과 욕설을 뒤섞어서다. 그들을 바라보는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누군가 걱정돼 묻는다. “이상해 보여?” 이때 아이의 대답이 재미있다. “상관 쓰여요” 이상하지 않다는 뜻으로 도리질을 하면서. 내심 거슬려 죽겠는데 의젓함을 내보이려다 이도저도 아닌 표현을 한 것이다.

상관없다는 외면, 신경 쓰이는 속내 사이에서 사람은 늘 갈팡질팡한다. 얼마 전 실적 부진을 이유로 권고사직을 강요받은 한 후배는 그저 관심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제만 해도 함께 시시콜콜 떠들던 동료들이 모른 체 하는 게 가장 속상해요. 알고 있다고, 상투적이지만 힘내라는 말이라도 해주면 고맙겠는데….”

쉬운 일은 아니다. 때로 한 극단에 서야하는 결정일 수도 있다. 학교나 직장에서 종종 발생하는 집단 괴롭힘을 예로 보자. 대개 피해자의 영역에 묶이기 싫어 차라리 가해자의 편에 서는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나의 동류의식에 편승할 수 있다면, 반드시 골라야 한다면, 부도덕에 기대어서라도 피해를 면하려는 것이다. 방관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외면은 곧 도피가 되고, 속내는 무용지물이다. 아이의 도리질만 보고 어떤 해석을 내릴 수 있겠는가.

언젠가 추레한 기억을 이 지면에 들추어 내보인 적이 있다. 한 때 몸담은 회사의 대표가 도모하는 사업 외도에 몸과 마음을 착취당하던 시절이었다. 여명과 석양이 교차해도, 삭풍 부는 도시가 숨을 죽여도 일의 실타래는 이어졌다. 낮의 업무와 밤의 일에 구분이 없었다. 그때는 온통 추웠다. 고된 노동에 추웠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쓸쓸함에 벌벌 떨었다. 짐짓 치를 떨면서도 어렴풋하게 갈망했던 것은 아마 나 역시도 동료들의 관심이었던 것 같다. ‘지켜보고 있다’는 인지의 신호.

한동안 가닿을 수없는 존재에 천착하며 자책과 번민으로 한없이 침잠해 있을 때, 나를 끌어올린 것이 이러한 신호였다. “슬퍼보여서 신경 쓰인다”는 선량한 참견. 내 슬픔이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비로소 심연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다.

스테디셀러 ‘사랑의 기술’을 쓴 에리히 프롬의 개념을 빌리자면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행위이다. 그 대상은 이성, 부모, 이웃, 친구를 가리지 않는다. 사랑의 의미는 한 겹이 아니다. 사전에도 나와 있다. ‘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이라고. 관심, 연민 따위의 말로 바꿔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한 감정의 표출이 에리히의 사랑이다. 거칠게 말하면, 하여튼 마음이 움직였다면 느끼지만 말고 보여주란 뜻이다.

(CNB=선명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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