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텔링] 삼성·현대차·SK·LG…‘재계연합’ 가능할까

2주간 네번 불려간 총수들…동맹 논의 ‘수면 위’

도기천 기자 2019.07.10 09:16:14

미중무역 분쟁, 일본의 통상 압박, 급변하는 남북미 정세 등 나라 안팎의 정치·경제 환경이 하루 다르게 변하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재계연합체 설립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한반도 주변환경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과거 재계를 대표했던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이 사실상 ‘식물’ 상태라는 점에서 새로운 동맹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 하지만 재벌에 대한 따가운 시선이 부담이다. 재계가 ‘그 시절’처럼 하나로 뭉칠 수 있을까. (CNB=도기천 기자)

 

글로벌 경제위기 상황이 계속되고 있지만 구심점이 사라진 재계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주요그룹 총수들이 지난달 30일 방한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간담회를 갖고 있다. 왼쪽부터 손경식 CJ그룹 회장, 허창수 GS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로이터TV제공=연합뉴스)
 

靑, 잦은 호출에 피로감 누적
전경련 구실 못해 연합체 절실
이재용·최태원, 호감도 급상승
재벌 보는 시선은 동맹 걸림돌


“경쟁관계인 대기업 총수들이 서로 협력하기 쉽지 않지만 평양정상회담 이후 분위기가 크게 변했다”

복수의 재계 관계자는 주요그룹 총수들이 서로 마음을 열기 시작한 계기가 작년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 경제사절단 자격으로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겸 두산인프라코어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구광모 LG 회장 등이 2박3일 간 평양을 방문했는데 여기서 마음이 통했다는 것. 당시 기업총수들은 같은 호텔에서 묵었는데 서로를 챙기고 배려하는 모습이 자주 카메라에 잡혔다. 나란히 백두산을 오르고 대동강변에서는 함께 셀카를 찍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이후 나라 안팎의 정치·경제 환경이 크게 달라지면서 재계 또한 공동대응 해야할 사안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선 가장 큰 변화는 정부의 기업정책 기조가 바뀐 점이다. 지난해 연말 문 대통령의 복심으로 재벌개혁을 주도했던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퇴진하고, 시장친화적 인물로 알려진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경제사령탑에 오르면서 ‘기업투자 활성화’를 전제로 하는 ‘혁신성장’이 화두로 등장했다.

이에 따라 연초부터 이낙연 국무총리가 삼성 수원공장을 방문해 이재용 부회장과 간담회를 가졌고, 4월에는 문 대통령이 직접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을 방문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삼성의 원대한 목표 설정에 박수를 보내며 적극 돕겠다”며 발언 강도를 높였다. 경제 관료들은 재계 인사들을 만날 때 마다 기업투자를 독려하며 제도적 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글로벌 환경도 크게 달라졌다. 미중무역 분쟁이 고조됐으며, 중동 산유국들과 미국 간의 마찰 등으로 환율·금리·국제유가의 불확실성이 커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일본 정부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에 대한 대책 논의를 위해 지난 7일 오후 서울 김포공항을 통해 출국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VIP 들러리로 전락했나

 

이에 기업총수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앞다퉈 투자계획을 발표하고 정부가 주관하는 기업인과의 간담회 등에 빠짐없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최근 2주간의 행보는 최고조에 달했다.

 

지난달 26일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방한하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 최태원 SK회장, 구광모 LG대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5대그룹 총수들은 많게는 3번씩이나 왕세자를 만났다. 이들은 청와대로 달려가 왕세자와 비공개 만찬을 가진데 이어 이재용 부회장이 주관한 승지원 회동에 참석했으며, 일부는 롯데호텔에서 단독 면담했다.

 

나흘 뒤인 지난달 30일에는 방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간담회에 참석했다. 이때는 5대그룹 외에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허창수 GS그룹 회장, 손경식 CJ그룹 회장,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허영인 SPC 회장, 박준 농심 부회장, 우기홍 대한항공 대표이사 부사장 등이 동석했다. 미중 무역분쟁 와중에 ‘아메리카 퍼스트’ 전략을 구사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다는 점에서 상당한 부담을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

 

이로부터 일주일 뒤인 지난 7일에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이 홍남기 경제부총리,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과 비공개 회동을 가졌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날 이재용 부회장은 일본으로 날아가 현지기업인들과 머리를 맞댔다. 

 

또 10일에는 30대 기업 총수 및 전문경영인들이 문재인 대통령이 주관한 경제계 간담회에 참석해 일본의 수출규제 등 경제 현안에 대해 의견을 개진했다.  

 

이처럼 불과 2주 남짓한 기간 동안 주요그룹 총수들은 청와대를 수차례 들락거렸다. 

 

5대그룹 총수들. 왼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
 

숨죽인 재계, 각자 각개전투

재계는 이런 상황에 대해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남북경협은 긴 시간이 필요해 당장 실익이 없음에도 정부의 들러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또 일본과의 갈등은 정치외교적 문제에서 불거진 만큼 기업인들이 나서기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 트럼프와의 만남 또한 중국과의 무역을 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난감한 상황이었다.

재계는 불편한 상황이 계속되는 이유가 구심점이 사라졌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한 대기업 고위관계자는 CNB에 “과거 전경련이 건재했던 시절에는 기업들이 정부와 전경련 간의 협의를 거쳐 움직였는데, 지금은 이런 과정이 생략된 상태”라며 “심하게 표현해 5분대기조 상태에서 (총수들이) 불려 다니다보니 해외출장도 (정부의) 눈치를 봐가며 잡는다”고 말했다.

실제 신동빈 롯데 회장은 김상조 정책실장 등과의 회동 때 일본출장이 잡혀있어 청와대에 미리 양해를 구한 바 있으며, 왕세자 방한 때는 총수들의 동선이 엇갈렸다. 전경련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던 과거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1961년 출범한 전경련은 한때 경제계를 대표하는 단체였지만 각종 정치스캔들에 휘말려 위상이 크게 실추됐다. 여의도 전경련빌딩 입구에 설치된 박정희 전 대통령 휘호 기념비. (사진=CNB포토뱅크)
 

전경련이 사실상 식물 상태로 전락한 데는 박근혜 정부와의 유착관계가 원인이 됐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에 휘말려 재벌총수들이 줄줄이 검찰·특검의 조사를 받았고 국회에 불려 나갔으며 이중 일부는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전경련은 차기 회장 선출을 위한 정기총회를 열었지만 10대 그룹 회장이 모두 고사해, 결국 허창수 GS그룹 회장이 ‘셀프 연임’을 결정하며 자존심을 구겼다. 이후 계속된 남북정상회담과 한미정상회담 때도 ‘패싱’을 당했다.

대안으로 부상한 대한상의(대한상공회의소)는 전체 회원사 수가 약 17만 곳으로 전경련, 경총과 비교도 안될 만큼 규모가 크다. 대·중소기업은 물론 지방기업, 벤처기업들까지 가입돼 있어 재벌개혁 이슈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하지만 회원사가 대부분 중소·중견기업이라는 점에서 재계를 대표하는 창구로 보기는 어렵다는 게 주요 그룹들의 판단이다. 따라서 재계는 새로운 구심점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재계서열 1위 기업의 오너로서, 최태원 SK 회장은 소탈한 맏형 이미지로 주목받고 있다. 작년 9월 평양정상회담 때 최태원 회장이 대동강변에서 이재용 부회장, 구광모 LG 회장 등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평양사진공동취재단)
 

혼돈의 시대, 사령탑은 누가?

이런 가운데 이재용 부회장과 최태원 회장의 역할론이 부상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재계서열 1위인 삼성의 실질적인 오너라는 점에서, 최 회장은 한국경제의 새로운 돌파구로 부상한 중동지역에 넓은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다.

이 부회장은 지난달 사우디 왕세자가 방한했을 때 5대그룹 총수들과 왕세자 간의 승지원 회동을 주선해 주목받았다. 승지원은 삼성그룹 이병철 창업주가 살던 집을 개조한 곳으로, 여기서 총수들의 회동이 있은 것은 2010년 전경련 회장단 만찬 이후 9년 만이다.

최 회장은 최종현 선대회장 때부터 50여년간 이어져온 중동 왕실과의 끈끈한 인맥으로 부러움을 사고 있다. 중동 산유국들은 석유의존경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보통신기술(ICT) 영역을 미래먹거리로 설정했는데 이는 한국기업에게 기회가 되고 있다. SK가(家)는 1970년대 초반 우리나라 최초로 중동석유사업에 진출해 지금까지 그곳에서 석유화학·에너지 사업을 펼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친화력이 높고 국내외 기업인들 사이에 마당발로 알려졌다는 점에서 재계의 구심이 될 가능성이 점쳐진다.

재계 관계자는 CNB에 “이재용(51), 정의선(49), 구광모(41) 등 젊은 총수들에 비해 맏형격인 최 회장(59)은 지난 평양정상회담 때 소탈한 모습으로 뛰어난 친화력을 보였고, 이 부회장은 베일에 가려진 삼성가의 모습을 벗어나 글로벌 보폭을 넓히고 있다”며 “두 사람이 서로 소통이 잘 된다는 점도 재계가 주목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하지만 재벌을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은 새로운 연합체가 논의되는데 부담을 주고 있다. 과거 삼성 현대차 SK LG 포스코 롯데 GS 한화 KT LS CJ 두산 한진 금호아시아나 대림 신세계 아모레퍼시픽 부영 등 대기업들은 최순실씨가 실소유주인 미르·K스포츠재단에 수십~수백억원씩 출연했고, 문재인 정부 들어 이같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재벌개혁’이 핵심이슈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국재벌사>의 저자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는 CNB에 “승지원 회동 등에서 보듯 새로운 재계 동맹이 결성된다면 과거와는 분위기가 크게 다를 것”이라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정경유착 고리로서의 전경련이 존재했다면 앞으로의 연합체는 철저한 기업실리 위주로 갈 가능성이 높다. 이는 지금의 총수들이 정경유착에 대한 수업료를 톡톡히 치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CNB=도기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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